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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13. 2019

노는 게 처음이라서

죄책감 대신 박수를

회사를 다녔다면 정년퇴직을 하고도 남았을 엄마 아빠는 몇 년 전 하던 일을 접고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블루베리 농장이었다. 3년 동안 부지런히 배우고 준비해서 키운 블루베리를 판매한 지 3년째가 되던 해, 엄마 아빠는 어쩐 일로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힘들다고 사람을 쓰면 인건비 때문에 손해고, 블루베리 농장이 많이 늘어서 지금 그만두면 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미련 없이 그만 하겠다고, 보조금도 받을 테니 있는 돈 아껴 쓰면서 살겠다고 선언했고, 나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40년 가까이 매일 같이 몸을 쓰는 일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라도 좀 편히 지내면 좋겠다고. 그래도 돌봐야 하는 텃밭이 있고, 인근 화훼단지에 뻔질나게 가서 새로운 꽃과 식물을 사다 심을 게 분명하고, 매일 밥을 챙겨줘야 하는 고양이와 강아지와 닭이 있으니 적적하진 않겠지.


그리고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한 때 ‘엄마 아빠에게 외국인 친구가 생겼나?’ 오해하게 만든 엘리엇, 엘리자베스, 노스랜드 같은 이름을 가진 블루베리 나무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아빠는 새롭게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 새로운 작물을 시작해도 몇 년 후에나 열매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블루베리보다는 몸이 덜 힘든 걸 찾을 거라고 했다. 엘리엇 등이 떠난 자리를 새롭게 채울 걸 찾느라, 매일같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정보를 찾고, 다른 농장에 견학을 가기에 바쁘다.  


일흔을 앞두고도 변함없이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며 몸을 움직이는 엄마 아빠 앞에서 나는 ‘고작 10년 좀 넘게 일했다고 쉬고 싶어 하는 나약한 요즘 애’처럼 느껴진다. (나도 중간에 한 번 쉬지도 않고 회사를 다녀서 좀 대단한 거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새로운 취미도 아니고 새로운 일을 위해 뭔가를 배우고 노력하다니, 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의 딸은 쉬는 동안 수영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한 지 3개월 만에 강습 신청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제 좀 쉬어도 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어 지기도 한다. 마치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 그렇게 앞날 걱정도 안 하고 놀아도 되는 거니?’하고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불안해할 때마다, H는 말한다. “그럼 퇴사한 거 실수였다고, 다시 일한다고 회사에 전화해줄까? 그건 싫지? 쉬고 싶어서 그만둔 거잖아.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을 좀 즐겨.” 여전히 새로운 걸 배우면서까지 일을 하려는 엄마 아빠를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H에겐 ‘놀겠다고 해놓고 왜 놀지를 못하니’ 같은 사람인 거다. 그동안 막연하게 우리 엄마 아빠는 ‘부지런하게 사는 게 당연한 세대’라 그런 줄 알았는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이 불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라 그럴까? 돌아갈 곳 없이, 끝이 정해져 있지 않는 쉬는 시간이. 학교 다닐 때 방학이 제일 좋았지만, 방학의 끝엔 새 학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의 스트레스조차 없는 어학연수 시절이 좋았지만, 1년 후엔 다시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땐 휴가가 꿈처럼 좋았지만, 금세 다시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이 휴식의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그 끝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거다. 언젠가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스스로 내가 있을 자리를 찾거나 만들어야 하는 거다. 나는 아직 이 휴식을 끝내고 싶지 않다. 좀 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지를 찾고 싶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엄마 아빠가 금방 새로운 일을 찾았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새로운 일을 찾아서 축하한다고 박수를 치며 응원하면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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