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와서 이불을 바꿨다
동네 산책길에 코인 세탁소 건조기에서 이불을 꺼내는 사람을 봤다. “이봐, 이불 바꿀 때야. 새벽에 추워서 깼잖아.” 우리 집 침실은 아직 시원하고 보드라운 여름 이불 차림이다. H가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이 오기 전 큰 맘먹고 백화점에서 상품권으로 구매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 흰색 이불을 걷어 세탁기에 넣고, 압축팩에 보관해둔 이불과 커버를 꺼내 잠시 고민한 후 짙은 청록색을 골랐다.
보라색과 자주색의 중간 어디쯤, 커다란 꽃무늬로 채워진 극세사 이불은 여러 번 내 겨울과 함께 했다. 수면 잠옷과 양말이 유행하던 겨울에 인터넷 쇼핑으로 산 기억이다. 커다란 꽃무늬라니, 선드레스를 제외하고는 손이 갈 리 없는 촌스러운 디자인을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던 건 그게 이불이었기 때문이다. 복층 오피스텔에 살았던 나는 '이사 갈 때 버릴 거니까', '누가 와도 안 보이니까'라는 생각으로 10만 원짜리 매트리스를 쓰고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이불 역시 저렴하고 따뜻하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자취를 시작할 때 엄마가 사준 이불도 모서리가 터질 때까지 별 불만 없이 썼으니까.
H가 혼자 살던 집에는 멀바우 침대 위에 녹색 체크 이불이 놓여있었다. 이사 갈 때면 미련 없이 버릴 게 분명한 컴퓨터 책상이나 좌식 테이블, 여기저기 쌓인 짐 때문에 조금 정신없는 방이었지만, 침대가 있는 공간만큼은 잡지에 나오는 '1인 가구 침실' 같았다. 메세나폴리스에 있는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시작 전까지 무인양품에서 시간을 보냈다. H는 자주 침구 코너 앞에 멈춰 섰고, 세일이라도 할 때면 좀 더 오래 멈춰 있었다. 한 번은 단정한 네이비 커버를 집어 든 그를 따라 제일 저렴한 걸 나도 사봤다. 10만 원짜리 매트리스 위에 꽃무늬가 사라지고 아이보리색 이불이 덮였다. 아침에 이불을 정리하고 내려갈 때, 자려고 계단을 올라 단정한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이사를 하며 10년 넘는 슈퍼 싱글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는 퀸 사이즈 침대를 갖게 됐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침구가 필요했다. 당장 쓸 거 하나만 우선 사려고 했는데, 이건 화려해서 좋고, 이건 깔끔해서 좋고, 이건 귀여워서 좋다며 신이 난 H에 이끌려 이불 커버를 4개 사서 돌아왔다.
10여 년 동안 남의 집을 빌려서 살며 많은 것을 보고도 안 본 척할 수 있게 됐다. 체리색 몰딩이나, 모서리가 들린 시트지, 원래는 흰색이었을 거라 짐작되는 실리콘, 이해할 수 없는 색상 조합이나 무늬가 있는 문 같은 것들이다. '지금과 달랐으면 좋겠는데' 생각하지만, 이 공간을 빌려서 사는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니까 금방 눈에 익어 어떠한 감정도 갖지 않는 능력을 획득한 것 같다.
여전히 우리 집엔 '다음에 이사 갈 때 바꾸자'하고 적당히 고른 것들도 많지만, ‘돈 줄 테니까 침대만큼은 좋은 걸 사라’는 엄마의 말을 들었고, 이불만큼은 마음에 드는 걸 덮고 싶다는 H의 말도 들었다. 여전히 잠들기 1시간 전쯤 들어가 곧 불을 끄고 아침이 되면 나와버릴 침실이지만 이제는 안다. 웬만한 호텔에서는 우리 집 침대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걸. 단정하거나 귀엽거나 화려하거나 따뜻한 이불이 있어 자려고 방에 들어갔을 때 기분이 좋을 거라는 걸. 빌려 쓰는 공간인 건 변함없지만, 잠을 자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꾸민 공간에 있다는 걸. 오늘이라도 당장 다른 느낌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