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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Oct 05. 2024

해인사의 이별택시 그 후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N은 천천히 해인사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달빛도사와 함께 타고 왔던 그 택시엔  

흰머리가 히끗한 어떤 기사아저씨가 운전석 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그리고 힘없이 걸어 나오는 눈이 퉁퉁 부은 N을 반기며 말한다.


"오래 걸리셨네요 손님 ~

잠깐 이면 된다고 하시더니 허허

이제 출발하시는 거죠~?"


분명 처음 본 택시기사지만

누구에게 얘기를 들은 건지 그는 이미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 네... 가야죠."


-


가로수길이 이어지는 창 밖의 풍경들이 무상한 추억처럼 덧없이 N의 시선에서 스쳐갔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어디든 상관없으니 서울 아무 데나.

번잡하고 복잡한 도시를 빙빙 돌다가 어느덧 불쑥 멈춰달라 하고 내린 동네.

지하철역 근처엔 늦은 시간까지 젊은 사람들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고

사거리의 네온사인은 번쩍거렸다.

N이 썩 좋아하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귀를 뚫고 들어오는 거리의 소음과 촌스럽게 번쩍거리는 불빛들.

그 속에 견디고 서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전봇대에 붙은 '원룸 있습니다' 종이를 몇 개 읽어보다가

왠지 깨끗할 것 같은 느낌에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월세 28만 원짜리 방을 얻기로 한다.


저렴하고 깨끗한 하나 남았으니 지금 들어오겠냐 하는 통화에 고민할 것도 없이

수긍을 한 후 광진구 자양동 어느 골목에 위치한 작은 빌라로 향했다.


-


오래돼 보이는 건물이지만 내부가 깨끗했다.

작은 냉장고에 쪼그만 주방도 붙어있고 세탁기는 층마다 공용 세탁실에서 써야 하지만

화장실이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주인이 보내준 계좌로 이번달 월세를 입금하고 계약은 체결되었다.

몰려오는 피로에 가방을 풀고 샤워를 하고 잠부터 자려는데

당황스럽게도 화장실에 물이 안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주인과 통화를 하고

10분쯤 후 근처에 산다는 주인이 왔는데

놀라운 것은 집주인이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서 N의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여성, 바로 그녀인 것이다.


-


N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잠이 안 올 때면 노트에 일기를 썼다.

일기라기 보단 끝없이 피어나는 상념을 풀어내는 낙서.. 혹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바람 등이었다.  

가끔 옆자리의 그녀가 쉴 새 없이 뭔가를 끄적거리고 혹은

긴 글을 쉼 없이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을 알았다.  


서울을 헤매다 쉽게 고른 이 빌라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년의 그녀 또한 N을 기억하고는

여기서 만나다니 너무 신기하다며

금세 근처에 있는 수리공을 불러 수도관에 막힌 돌멩이와 찌꺼기들을 빼내주었다.

그리고는 반가운 인연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핸드백에서 연극 티켓 두장을 꺼내더니 N에게 선물로 준다.

그녀는 자신이 작은 극단을 운영하는데 관객이 많지 않아 매번 수익이 많이 나지는 않아서

그저 자선사업 같다느니.. 그럼에도 연극은 매력이 있다며 하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후 돌아갔다.


N은 드디어 따뜻한 물에 씻은 후 쉴 수 있었다.

침대가 없는 원룸이었는데 아직 이불도 하나 없으니

차가운 바닥을 데우기 위해 보일러를 켠다.

데워지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얼음장 같은 바닥 위에 그저 누워본다.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리고 스스로 팔을 구부려 머리를 대고 눈을 감는다.

왠지 익숙한 어둠이 몰려왔다.  

천장 위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템스강의 강물이 밀려내려 오고  

서늘한 바닥에선 코 끝에 새겨진 금목서 향기가 슬픈 전주곡처럼 맴돌았다.

세계의 모든 눈물이 무너져버린 N에게 몰려와 항의하듯 쏟아졌다.  

말로 눈물로 무수히 토해내도 무한히 생성되는 거센 그리움이 수시로 N을 찾아와 고문을 가했다.

어느 날부터는 대상을 정의할 수 없는 신에게 끝없는 용서를 구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이리 잘못했냐고

정말 그렇다면 부디 나를 용서해 달라고

이토록 고통스러운 그리움의 지옥에서 부디 나를 풀어달라고 빌었다.

  

-


한 달 후.


화양동의 어느 골목 지하에 위치한 그 소극장은 허름했다.  

지하 입구 벽돌에 돌출 형 작은 글자로 '은하수 극장'이라 표시된 것 말고

아는 사람이 아니면 발견하기 힘들 것 같이 생겼다.

들어가는 녹은 철문은 아이보리 색으로 페인트 칠이 되어있었는데

문에는 N이 보러 온 연극의 포스터 한 장이 달랑 붙어있었다.


<연극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N은 극장 문을 열고 어두컴컴하고 좁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그런데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그 작은 소극장에 놓인 의자는 30여 석쯤.

평일 낮시간 이렇게 조용했던 골목 지하에

관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 더듬어 빈 의자 하나에 앉는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관객으로 온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 익숙한 낯이다.

어린 시절 그 아파트에 함께 살았던 이웃들일까.

혹은 그들의 자식들일까.

소녀였던 N의 중학교 시절 스쳐가는 옆 반 아이들의 얼굴을 닮기도 했다.

창신여고에서 춤을 출 때 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보던 옆 남학교 학생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N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무관심해 보였다.

강렬하게 밀려드는 그 얼굴들의 기시감을 애써 억누른다.


연극의 막이 오른다.





-15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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