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종교를 믿어버리게 되면 어쩌지

by 고니크

나는 언젠가 종교를 믿어버리게 될 것만 같다. 분명히 엄마의 죽음이 나를 무신론자로 자라게 했는데 말이야.


오늘 오랜만에 소연이를 만났다.


ㅇㅇ이가 안부 전해달래.


ㅇㅇ이? 나로선 2초 버퍼링 후에야 떠오르는 사람. 내 최고 못난이 시절 소연이를 통해 만났던 구남친이다. 나에게 그는 짧고 어렴풋한 몇몇의 순간만을 떠올리게 하는 옛 인연정도인데, 들어보니 내가 그의 7년을 쥐잡듯 흔들어 놓은 모양이다.


7년, 7년이라니. 우리가 만난 건 1년 정도 아니었나?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그렇게 크고 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지. 나란 사람은 뭐란 말인가? 나에게 누군가의 뿌리를 쥐고 흔들 힘이 있었다면, 왜 그 힘은 세상으로 뻗지 않고 애먼 사람 마음 속으로 꽂혀들어갔을까. 도대체 내 어디에서 그런 게 발휘됐단 말이야.


나는 나쁜 사람인가?

초등학교때 동네 여자애한테 500원을 삥 뜯은 적이 있어서? 사촌언니 팔찌를 몰래 가방에 숨겼어서? 아빠 정장 바지를 뒤져서 돈을 꽁쳐먹기도 했어서?


하지만 난 그 여자애에게 장문의 사과의 편지와 진짜 사과와 천 원을 돌려줬는데. 가방에 숨겼던 팔찌는 금방 들통나서 다시 뺏겼단 말이야. 아빠 바지를 뒤져서 나온 돈으로 어버이날 선물을 샀었다고. 나는... 착하지도 않고 딱히 나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나는 그저 우리집에서 태어났고,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자라 인격이 느리게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덜 사회화 된 채로 대학생이 되었을 뿐. 내 조건에 맞춰 자연스럽게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고. ㅇㅇ씨는 그 시기의 나를 잠깐 들렀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조금 억울한 감도 있는 거야. 어?

그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

어?!

...

미안해. 미안하다고.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말을 해본다.


... 원죄론이라는 개념, 내가 종교에서 제일 흥미로워하는 개념인데, 인간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라고. 어떻게든 죄를 짓게 되어 있다고. 아니 이미 죄를 가지고 태어난 거라고. 그래, 그 말이 맞는가 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미숙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 미숙했다는 이유로, 나도 모를 스노우볼이 굴러가고 있었구나.


무섭다. 나는 지금도 어떤 시기를 통과하는 중인데. 이 시기에 나에게 정차한 또는 주차한 사람에게 난 또 스노우볼을 던지는 중이겠지. 그게 굴러 굴러 어떤 눈덩이가 될지도 모르고.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미 죄 지은 인간이라면, 과태료 정도였음 좋겠다고 생각하며. 징역살이는 피해보는 거야. 그러려면... 다정해야지. 최선을 다해, 힘을 내서 다정해야지. 나아중에 죽고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있는 게 정말 신이면, 신이 있는 거라면 조금의 정상 참작을 기대해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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