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사랑의 힘이다

2025.01.23 율이 생후 234일의 기록

by 곰곰

임신했을 때 미세먼지 상황을 알려주는 어플을 자주 들여다봤었다. 율이를 만나고 나서도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어플을 켜서 공기 상태를 확인한 후 환기를 했었다. 겨울치고 날씨가 풀려서 그런 것인지 미세먼지가 '최악'으로 안내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나아진 게 '상당히 나쁨'


얼마 전, 남편이 가스레인지를 켜면 발암물질이 나온다며 사람들이 그래서 인덕션을 쓴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는 이사 가면 인덕션으로 하자며, 일단 가스레인지를 켜면 환풍기를 무조건 켜고, 창문도 열어 환기를 하자고 했었다.


미세먼지가 ‘최악’인 상태에서, 도저히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점심은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으로 해결했고 저녁에 남편이랑 밥을 먹을 때도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카레 같은 것을 데워 먹었다.

가스 불을 사용하기가 참으로 난감하다 생각했는데 냉동실에 얼려둔 이유식 재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계산해 보니 이러다 쌀오트밀죽만 주게 될 것 같았다. 가스레인지를 켜면 발암물질이 나온다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환기도 못하고... ‘율이 이유식은 뭘로 주지? 어떡하지?’

‘야채 토핑 가짓수를 1개씩만 줄까...?’ 고민하다 퍼뜩 시판이유식이 생각났다. 요즘 배송은 빠르니까 빨리 오겠지! 하며 시판 이유식을 생각해 낸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다.


동네 친구들부터 해서 나와 소통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있었다. 토핑 이유식이 쉽다고 '쪄서 갈기만 하면 된다'길래 시판 이유식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어떤 브랜드의 제품이 좋을지, 어떤 야채들을 주문할지 알아보다 드디어 주문!

마침 오늘 낮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두 번째 이유식부터는 넉넉히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판 토핑 이유식은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했었다.


율이는 오전 낮잠을 길게 자고 오후 낮잠은 30분만 자곤 했었는데, 낮잠을 2시간이나 잤다. 나도 함께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곧 두 번째 이유식을 먹일 시간이었다.


도착한 택배를 뜯어보니 재료들이 아주 꽝꽝 얼어있었다. 당장 먹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동을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 친정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전자레인지로 돌리면 된다고 하셔서 율이를 하이체어에 앉혀놓고 준비를 했다. 선택한 메뉴는 ‘시금치, 양배추, 고구마’ 평소에 자주 먹었던 익숙한 음식들을 주기로 했다.


기대하며 율이에게 주었는데, 삼키지 않고 내뱉었다. 아랫입술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는 음식들을 숟가락으로 끌어올려 입으로 넣어주었다. 이유식을 주면 또 내뱉고 나는 또 끌어올려 먹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윗니가 나오려고 하나? 이가 불편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먹는가 싶더니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 다 먹일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이유식 일부를 덜어냈다. 맛을 봤는데 만들어준 것과 다른 맛이 나긴 했다.


시판 이유식은 금요일까지 먹일 계획이었고 주말에 몰아서 토핑들을 만들려고 했었다. 내일도 시판 이유식을 주면 율이가 잘 먹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세먼지 상태를 확인해 보니 ‘양호’ "율아! 율아! 미세먼지 좋아졌다!"


금요일부터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늘부터 풀리는 모양새였다. "율아, 우리 잠깐 나갔다 올까?"

다시 한번 미세먼지 상태를 확인하니 ‘좋음’


‘좋음’이 또 언제 나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기가 좋은 틈을 타 토핑들을 만들기로 했다. 마음이 급했다. 정말이지 공기 상태는 예측할 수 없어서, 짧은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부랴부랴 율이 옷을 입히고 나갈 채비를 해서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 갔다. 손질이 쉬운 재료들을 구입하기로 했다. '애호박, 당근, 새송이버섯'을 고른 후 집까지 또 아주 빠른 걸음으로 왔다.


"율아 성공했어! 엄마, 지금 빨리 만들고 올게"

어제 친정엄마가 사다 주신 '감자, 오이'까지, 만들 토핑은 5가지였다. 내가 부엌에 있고 소리가 계속 나다 보니 어느새 율이가 발밑에 와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빠르게 재료를 손질하고 알람을 맞춘 후 빠르게 찜기에 넣었다. 찌는 동안, 율이와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알람 소리를 듣고 다시 부엌으로! 유리 용기에 재료 하나씩을 넣어 식혔다. 식히는 동안 다지기를 준비했다.


"율아, 이제 식으면 갈기만 하면 돼!"


감자를 갈고는 다음번 재료도 갈기 위해 다지기를 씻어두었다. 큐브를 저울 위에 올려두고 0.0g으로 맞춘 후 감자 15g을 담았다. 15g을 넣고는 저울 초점을 0.0g에 맞추고 다시 15g을 넣으며 반복 작업을 했다. 감자는 양이 제법 되어 12구가 모두 채워졌다. 다음으로는 당근, 애호박, 새송이버섯. 똑같은 과정을 4번 반복하는 동안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율이는 처음 만져보는 로션통을 가지고 놀며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오이는 양이 적어 갈기 어려워 보였고 도마를 깨끗이 씻어 칼로 다져 유리 용기에 담았다. 이번에는 뒷정리! 정신없이 뒷정리를 하는데 율이가 칭얼댔다. 요 며칠 간식을 줬었는데 오후 낮잠이 길어지면서 타이밍을 놓쳤다. ‘지금이라도 줘야 하나?’

율이를 급히 하이체어에 앉혔다. 친정엄마가 가져다주신 세척 사과를 냉장고에서 꺼내 포장을 뜯고 한 번 더 씻은 후 큰 덩어리로 잘랐다. 과육 부분을 티스푼으로 삭삭 긁어 주었다. 새콤한지 눈이 커지며 표정이 변했다. 간식을 먹인 후 율이에게 이유식 스푼을 쥐어주었다.


"율아, 엄마 뒷정리 좀 할게!"


아주 빠른 속도로 큐브 뚜껑을 덮고 라벨링을 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찜기를 설거지하려고 보니 갈색으로 눌어붙은 자국들이 보였다. ‘아까 마지막에 오이 찔 때 냄새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오이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잠시뿐. 뒷정리를 하느라 그저 바빴다. 한숨 돌리는데 ‘어른들도 사과는 저녁에 안 먹는데 괜찮나?’ 저녁 6시쯤 율이에게 간식으로 사과를 줬다는 게 생각났다. 스스로 한다고는 하는데 구멍들이 보이는 게 웃겼다.


냉동실에 한동안 먹일 이유식 재료들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마침 친정엄마에게 연락이 와서 율이가 이유식 먹다가 내뱉었다며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율이가 이유식을 처음 먹은 날, 친정엄마는 내뱉지 않고 먹었다는 것에 놀라셨었다. 아무래도 율이가 그동안 만들어준 이유식에 익숙해진 것 같다며, 미세먼지 좋은 틈을 타서 장도보고 토핑도 5개나 만들어놨다고 하니 ‘진짜 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간 참 잘하고 싶었다. 조리원 퇴소 전날 막막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또 율이가 생후 58일에 급성신우신염으로 입원했을 때 퇴원 전날에도 막막했었다.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 아팠다는 자책으로 입원 기간 동안 마음이 힘들었었고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율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했었다. 심지어 부담스러운 마음에 내가 출근을 하고 남편이 율이를 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친정 엄마의 ‘진짜 잘한다’ 그 말씀은 어쩐지 울컥했다. 이유식을 만들면서 사실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부엌은 어수선 그 자체였고 나의 손놀림 역시 우당탕탕 그 자체였다. 나는 다만 ‘노력하고 진심을 담아 정성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마지막 수유 전, 율이가 배가 고픈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빠르게 젖병을 꺼내고 분유 가루를 젖병에 넣었다. 그리곤 율이를 왼쪽 팔로 안은 채 오른손으로 분유포트를 들고는 젖병에 물을 따라 눈금을 맞췄다. 순간 율이를 한쪽으로 안고, 또 한쪽으로는 분유를 타는 내가 능숙해 보였다. ‘잘하는 것’ 같았다.


율이가 아주 아주 더 아기였을 때, ‘잘’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도 보여서 잘‘에 대한 생각을 바꾸자며 하나씩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능숙함’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우당탕탕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있었다.


친정엄마의 ‘진짜 잘한다’는 말씀에서 ‘노력’하는 모습에 집중하게 된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는 특히 ‘지극정성’이란 단어가 종종 떠오르곤 했었는데 나는 율이를 ‘정성’으로 키우고 있다. ‘노력, 그리고 정성’ 이 말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5개 토핑 이유식 만들기 미션은 정말이지 ‘사랑의 힘’으로 해냈다.


20250123.jpg 5가지 토핑, 사랑의 힘으로 만들었다 (다지기 전 식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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