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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가을, 친구들을 따라 도서관에 갔다.
친구들은 수능 막바지 준비를 하기 위해 자율학습실에 갔지만,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갔고, 정작 공부는 제대로 못했다. 아니 사실 안 했다. 워낙에 공부에 관심이 없어, 학창 시절에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도망치고 피시방에 들락거렸던 터라(단지 게임에 미쳐있었다. 선생님한테 대들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책상에 앉아도 집중할 턱이 없었다.
굳이 도서관에 간 이유는 하나였다. 도서관 근처, 참치 비빔밥과 라면 반그릇에 4천 원, 자매 분식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같이 먹는 그 비빔밥이 그렇게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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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지 않는 나에게는 따로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서가로 향하긴 했지만, 책에는 기대가 없었다. 내게 독서는 지루한 행위였다. 국어 시간의 문학 지문은 늘 졸음을 불렀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한 문단을 넘기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떨구기 일쑤였다.
그러다 책 한 권을 만났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루나파크』. 책 속에서 나는 영국의 펍에 들어갔다. 피시 앤 칩스를 시키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펍 내부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영국인들을 바라봤다. 물론, 상상이었다. 고등학생이었고, 한국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펍 천장에 매달린 작은 TV에서 프리미어 리그 축구를 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독서가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 이후로 도서관은 내게 공부를 하러 가는 공간이 아니라, 할 일이 없을 때 가는 곳이 되었다. 수능을 피하고,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이유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 어떤 목적도 없이 들렀다가, 책 한 권을 꺼내 읽거나 그냥 앉아 있다 나오곤 했다. 도서관은 그런 애매한 시간들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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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동 도서관 마을은 서울 안, 그것도 연신내 근처의 건물 3채의 수익성을 포기하고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옛 빌라의 벽돌은 그대로 살아 있으며, 이전에 각각 다른 건물이었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도서관 안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앉아 쉬는 사람도 많았고, 가끔은 엎드려 자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학원을 갔다 와서 숙제를 하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무언가 꼭 하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머물고 싶은”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 이 도서관의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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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동 도서관 마을 사이사이에는 그냥 머물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최재원 건축가의 배려가 가득하다. 사이사이 앉을 공간이 굉장히 많다. 의자 옆에는 항상 짐을 둘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도 어디든 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매우 작아, 책을 읽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심지어 정말 작은 틈새 사이에 조명과 앉을 곳을 마련한 모습이 보였다.
건물을 3채 합쳐서 만들어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자투리 공간이 있었을 테고, 그걸 최대한 활용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원래는 건물의 외부였던 테라스 공간이 현재 도서관 메인 공간과 맞닿아 있다. 그 공간을 현재 책상과 의자가 놓여,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인다. 방이 여러 개였던 흔적 또한 많이 남아있는데, 각각을 잡지 보는 공간, 신문 읽는 공간, 미디어실같이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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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 생각났다. 읽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앉았다 가도 괜찮았다. 애매한 시간이 있다면 그냥 들렀다 가도 괜찮았다. 무언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장소. 그냥 머물다가 가도 상관없는 장소.
좋은 공간이란, 누군가의 시간을 조용히 기다려주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소: 구산동 도서관 마을
주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 13길 29-23
건축가: 최재원 건축가
- 누구나 입장 가능합니다.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공간의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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