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실은 물 냄새가 났다. 젖은 종이에서 올라오는 섬유 냄새, 물감이 마르는 아크릴 냄새, 철제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 창가로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상 위 물통에 작은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오늘의 과제는 ‘물체의 그림자 관찰’. 모두가 사과를 그렸다. 빨강, 노랑, 그림자용 프러시안 블루. 팔레트에서 물과 색이 얇은 원을 만들었다.
나는 붓을 씻기 위해 통로 쪽으로 돌아섰다. 팔꿈치가 책상 모서리를 스치지 않도록 각도를 15도 좁혔다. 계산상 안전했다. 그러나 오른쪽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의자를 빼는 바람에, 내 소매가 물통 손잡이를 가볍게 쳤다.
물은 미세한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방울의 지름은 약 3~5mm. 낙하 시간 0.4초. 경로 끝에는 정윤아의 도화지가 있었다.
툭, 툭, 툭—
하늘색으로 그라데이션 중이던 여백에 붉은 점 세 개가 박혔다. 물감이 젖은 종이 섬유를 타고 번졌다. 원형이 타원으로, 타원이 깃털 모양으로 퍼졌다. 확산 속도 초당 2mm. 나는 확산을 0.5초 늦게 멈추었다. 늦었다.
“야!”
윤아가 고개를 번개처럼 들었다. 눈이 커졌다가, 이내 눈썹이 좁혀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종이를 붙잡은 채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즉시 보고했다.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습니다. 유감입니다.”
내 목소리는 평평했다. 선생님의 기준으로 ‘정확한 발화’였다. 사실과 판단을 분리하고, 결과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나는 바로 티슈를 꺼내어 번지는 부분 가장자리부터 흡수하려 했다.
윤아가 손등으로 내 손을 밀어냈다. “건들지 마.”
물감은 더 퍼졌다. 그녀의 하늘에 얇은 상처가 생겼다.
나는 대안을 제시했다. “마르는 즉시 흰색으로 덮으면 복구 가능성이 60% 이상입니다. 아니면, 하늘에 새를 추가해 시선을 분산시키—”
“그게 지금 도움이 돼?”
윤아의 입술이 굳었다. 숨소리가 짧게 나왔다.
뒤쪽에서 누군가 킥 하고 웃었다. “야… 큰일 났다.” 다른 아이는 속삭였다. “쟤 또 말로 해결하려 한다.”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원인: 우발적 접촉 → 물 튐 → 작품 손상.
조치: 사과 발화(유감), 복구 제안.
예측: 분노 진정, 사건 종료.
그러나 예측은 빗나갔다.
윤아는 종이테이프로 가장자리를 더 눌러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말이 빠르게 나왔다. “그게 사과야?”
문장 길이 짧음, 억양 상승, 분노. 나는 잠깐 멈췄다. 사과가 아닌가? 사과는 손상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며, 향후 조치를 안내하는 의례다. 나는 방금 그 모든 단계를 실행했다.
“실수였고, 유감입니다.” 나는 반복했다. 정보는 반복될수록 확실해진다.
윤아의 눈이 더 차가워졌다. “유감? 네가 ‘미안해’라고 말했어?”
나는 대답했다. “같은 의미입니다. 유감은… 불행한 결과에 대한—”
“그만.”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손가락이 종이를 가리고 있었다. 마치 상처를 덮는 것처럼.
미술 선생님이 반대편에서 한 번 고개를 들었다 내려앉혔다. “물 조심해라.” 그 말은 우리 둘에게 동시에 향했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거두었다. 팔레트 긁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내 손등에 튄 붉은 점을 보았다. 지우개 가루처럼 작고 가벼운 점.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옅게 번졌다.
윤아의 종이 위 점들도 그렇게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 확산을 숫자로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확산을 손실로 보고 있었다. 같은 사건인데, 단어가 달랐다.
윤아가 그림을 들어 햇빛 아래로 옮겼다. 종이가 휘었다. 번진 자국이 빛을 받아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나는 말을 보류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나는 다른 무엇을 모른다.
나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정확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필요한 재료나—”
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두 글자. 더 이상 접근 금지.
그 말이 내 발목을 멈추게 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내 그림이 있는 자리까지 거리 4m. 걸음 수 6. 소요 시간 5초. 그 5초 동안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울렸다.
‘그게 사과야?’
자리에 앉아 붓을 들었다. 손가락 힘이 평소보다 세졌다. 붓 끝이 종이를 긁었다. 선은 두꺼워졌다. 의도하지 않았다.
나는 공책의 여백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었다.
“사과 = 사건 종결 의례.
현재 상태: 종결 실패.
변수: 말투, 표정, 눈빛, 거리… (정량화 불가)”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갔다. 빛이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윤아의 도화지 위 붉은 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내 안에도, 보이지 않는 점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작고 사소한, 그러나 도려낼 수 없는 점.
수업 종이 울렸다. 모두가 의자를 끌었다. 나는 붓을 씻기 위해 다시 물통을 들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꽉 쥐었다. 실수 확률 0에 가깝게 줄였다.
그러나 이미 발생한 사건의 확률은 100%다. 되돌릴 수 없다.
나는 문장 하나를 마음속에 저장했다.
“사소한 실수가, 큰 반응을 만든다.”
그리고 아직 정의되지 않은 항목 하나를 별표로 표시했다.
감정: 미측정.
수업이 끝나고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책상을 밀고 일어났다.
윤아는 그림을 들고 친구들 쪽으로 가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거 다 망했잖아.”
선미가 고개를 내밀며 그림을 보더니 입을 막았다. “헉… 어떡해. 색이 다 번졌네.”
다른 친구들도 모여들었다.
“와, 진짜 아깝다. 아까 되게 잘 그렸는데.”
“맞아, 하늘 색감 예뻤는데.”
그 말들은 사실이었다. 객관적 평가. 그러나 그 평가들은 곧 윤아의 감정으로 쏠렸다.
윤아는 나를 보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양손으로 잡고, 종이에 남은 붉은 점을 계속 노려봤다. 마치 그것이 내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다가가 다시 설명했다.
“나는 분명히 실수를 인지했고, 유감을 표했습니다. 원인도 인정했고, 복구 방안도 제안했습니다.”
목소리는 일정했고, 억양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건은 종료되었습니다. 왜 아직도 화를 내시는 겁니까?”
내 말이 끝나자 친구들 사이에서 킥킥 웃음이 터졌다.
“야, 얘 또 논문 쓰냐?”
“사건 종료래ㅋㅋㅋ”
윤아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웃음이 아니라, 억눌린 숨 때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단단했다.
“네가 사과했어?”
“네. 저는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건 불행한 상황에 대한 책임 인지와—”
“그건 사과 아니야!”
윤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주변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시선이 나와 윤아 사이로 집중됐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했다.
발화: ‘유감’ → 내 해석 = 사과.
상대 해석 = 사과 아님.
결론: 정의 불일치.
윤아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짧게 덧붙였다.
“넌 진심이 없어. 그냥 말만 하는 거잖아.”
그 말이 내 귓속에 박혔다. 진심.
논리적 해석 불가. 진심은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 단위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했다.
“사과는… 논리적으로 정리된 사건에 대한 종결 의례 아닙니까?”
하지만 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뒷문으로 나갔다.
남은 건 내 자리와, 물감 냄새, 그리고 아직도 젖어 있는 바닥 한 켠 뿐이었다.
나는 홀로 앉아 작은 메모를 남겼다.
“사과 = 나: 종결 의례.
상대: 감정 위로.
불일치 = 관계 단절.”
메모 끝에 작은 물음표를 붙였다.
“… 나는 분명히 사과했는데, 왜 더 화내는가?”
점심시간, 급식실은 웅성거림과 수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이들이 줄지어 식판을 들고 오며 서로 밀치고 웃었다. “야, 김치 많이!” “국 넘치잖아!”
그 안에서 나는 평소처럼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식판에 밥, 국, 반찬. 배열은 정갈했다. 나는 늘 그렇듯 정확히 10초 안에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눈앞의 음식이 선명하지 않았다.
시선이 자꾸 옆 테이블로 끌렸다.
정윤아와 친구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꺼내 친구들과 상의하는 듯 보였다.
찢어진 자국이나 번진 색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웃기도 했다.
웃음소리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내가 없는 웃음.
그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밥알은 씹히지 않고, 혀 위에 오래 머물렀다.
목으로 내려가는 속도도 둔했다.
내 몸은 정상인데, 식욕이 줄어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진단했다.
“위장 기능 문제없음. 체온 정상. 그러나 식사 속도 저하. 원인 불명.”
옆자리에서 누가 물었다.
“천재야, 너 오늘 왜 이렇게 말 없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평소와 동일합니다.”
그 대답은 사실이었으나, 스스로도 이상했다.
내가 평소와 같다고 말하는 순간, 평소와 같지 않음을 확인하는 셈이었다.
윤아는 한 번도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친구들에게만 머물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사과 발화 완료. 사건 종료 선언.
그런데도 상대의 태도 = 거리 증가.
결론: 언어 정보 외에 또 다른 요소 존재.”
숟가락이 식판에 부딪혔다. 금속성 울림이 귀에 크게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서 문장이 반복됐다.
“사과는 사건 종료의 의례다.”
하지만 눈앞 현실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과는 종료되지 않았다.”
나는 작은 수첩을 꺼내 적었다.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음.
사건 종결 ≠ 관계 회복.
사과는 데이터 정정이 아니라… 감정적 복원?”
내 펜 끝이 잠시 멈췄다.
단어 ‘감정’ 앞에서 글씨가 흔들렸다.
아직 확정할 수 없는 개념. 그러나 오늘 내 앞의 공기는 그 단어 없이는 설명되지 않았다.
식판 위 국이 식어갔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내 자리 위로는 또다시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고요를 관찰하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 나는 분명히 말을 다 했는데, 관계는 더 멀어졌다.”
방과 후 교실은 빠르게 비어갔다.
책가방을 메고 떠나는 아이들, 떠들썩한 발자국 소리, 복도에 울리는 웃음.
나는 평소처럼 천천히 교과서를 정리했다.
사건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귀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아 책상을 닦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복도로 나서자, 교무실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담임 선생님, 다른 한 명은 미술 담당 교사였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대화의 파형을 관찰하기 위해.
미술 선생님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아까는 좀 너무하시지 않았어요? 아이들 앞에서 목소리를 그렇게 높이시면…”
담임 선생님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내 눈은 본능적으로 그의 몸짓을 기록했다.
어깨가 살짝 내려앉고,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입술은 곧게 다물렸으나, 곧 풀어졌다.
담임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적으로 감정에 치우쳤어요. 제 말이 아이들한테도, 선생님께도 상처가 됐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 장면을 주의 깊게 보았다.
단어는 간단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단어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목소리의 톤은 평소보다 낮았고, 속도는 느렸다.
눈빛은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피하며 다시 마주쳤다.
두 손은 앞으로 모아졌다.
나는 즉시 수첩을 꺼내 적었다.
“발화: 사과.
동반 요소: 목소리(낮음), 표정(진중), 눈빛(상대 응시 후 회피), 자세(작아짐).
결론: 사과는 단어 + 비언어 신호의 총합.”
미술 선생님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뭐, 저도 좀 예민했네요. 앞으로는 아이들 앞에서는 좀 더 차분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과란 단순한 사건 보고가 아니었다.
그건 상대에게 ‘내 감정’을 꺼내 보여주는 행위였다.
말의 내용보다 말의 온도가 중요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한 “유감입니다”에는 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말은 평평했다.
정보를 전달할 뿐, 감정을 싣지 않았다.
그러니 윤아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복도에 저녁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나는 창가에 비친 선생님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작아진 어깨, 부드러워진 눈빛, 천천히 움직이는 손.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사과’라는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사과는 단어가 아니라, 감정을 담은 행위 전체다.”
다음 날 아침, 교실은 여느 때처럼 시끄러웠다.
창가 쪽 아이들은 서로 어깨를 치며 장난을 쳤고, 뒤쪽에서는 게임 이야기로 웃음이 터졌다.
나는 평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수학 문제를 풀려했으나, 연필 끝은 종이에 닿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계속 어제의 장면이 맴돌았다.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던 순간.
낮고 느린 목소리.
정면으로 마주치다가 이내 피하는 눈빛.
작아진 어깨.
그리고 마지막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
그 장면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온도였다.
나는 그 온도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윤아에게 하지 못한 나의 말과 비교되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수업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아는 창가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가슴속이 약간 답답했다.
심장은 평소보다 0.2배 더 빠른 속도로 뛰는 것 같았다.
손가락은 자꾸 펜을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흘렸다.
나는 윤아 앞에 멈춰 섰다.
친구들이 나를 보며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윤아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 박자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정윤아.”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계산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말이 그렇게 흘러나왔다.
“나는 당신의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내 실수로 당신의 노력이 훼손된 것… 정말… 미안합니다.”
마지막 단어 ‘미안합니다’는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건 복도에서 본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온 듯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내 어깨가 조금 작아진 것도, 눈을 피하다가 다시 마주친 것도, 모두 내 계산이 아니었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윤아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조금 풀렸다.
그녀는 종이를 접으며 짧게 대답했다.
“… 됐어. 다시 칠하면 돼.”
그 말은 ‘용서’라기보다는, ‘넘어감’이었다.
그러나 내 몸속에서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 사라졌다.
손끝에 걸렸던 긴장이 풀렸다.
마치 숨을 오래 참다가 내뱉은 듯, 안쪽이 가벼워졌다.
나는 곧장 수첩을 꺼내 적었다.
“오늘,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을 담는 그릇이었다.
상대는 크게 웃지도 않았고, 바로 관계가 복구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몸이 가벼워졌다.
사과는 사건 수습이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나누는 행위다.”
펜 끝이 멈추자, 내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평소처럼 계산된 미소가 아니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반응.
나는 속으로 짧게 결론 내렸다.
“… 진심은 기술이 아니라, 용기다.”
밤, 방 안은 고요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이 노트 한 장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지 않으면, 머릿속이 계속 울릴 것 같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단 한 장면이었다.
윤아 앞에서 했던 말.
“정윤아. 나는 당신의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내 실수로 당신의 노력이 훼손된 것,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수첩 첫 줄에 이렇게 적었다.
작성자: 이천재 (13세)
주제: 사과
1. 사건 기록
미술시간: 나의 부주의로 윤아의 그림에 물감 튐.
1차 사과: “실수였고, 유감입니다.” → 상대 반응: 분노, 불수용.
2차 사과: “당신의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 정말 미안합니다.”
→ 상대 반응: “됐어. 다시 칠하면 돼.” (관계 안정, 갈등 해소)
2. 분석
동일한 사건, 서로 다른 두 사과.
1차 사과 = 정보 전달 (사실 인정, 책임 명시, 복구 제안).
2차 사과 = 감정 전달 (목소리, 눈빛, 자세, 온도 포함).
결론: 사과는 정보 전달이 아닌, 감정을 실은 언어적 행위다.
3. 신체 반응
1차 사과 후: 긴장 지속, 관계 단절감 심화.
2차 사과 후: 가벼움, 긴장 완화, 미세한 미소 발생.
분석: 감정을 담은 발화는 나 자신에게도 변화를 일으킴.
4. 결론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사과는 종결되지 않는다.
진심은 단어가 아니라, 단어 안의 온도다.
오늘, 처음으로 내 말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감각을 느꼈다.
펜을 잠시 멈추었다.
단어들이 수첩 위에서 차갑게 나열되어 있었지만, 내 안에는 묘한 온기가 퍼져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윤아가 했던 마지막 말 때문일 것이다.
“됐어. 다시 칠하면 돼.”
그 말은 사건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내 말이, 상대의 말과 맞닿았던 순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어가 감정을 실어 나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크게 써 내려갔다.
“미안하다는 말은, 감정을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라… 용기다.”
수첩을 덮자, 방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그 고요 속에서, 내 가슴 한쪽이 조금 더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