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종이 울리자 급식실 입구가 혼잡해졌다. 스테인리스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 국자 닿는 금속음, 김 냄새와 후추 냄새가 섞여 공기가 따뜻해졌다. 나는 줄의 평균 이동 속도를 눈으로 계산했다. 분당 약 4.2m. 내 차례까지 대략 2분 30초.
앞에서 누군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늘 떡갈비래!”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음식의 종류가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 가설은 여러 번 확인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다른 종류의 실험이었다.
식판을 받으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창가 쪽 줄에서 정윤아가 보였다. 식판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무릎에 붙인 작은 반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 (1화의 잔여 표식) 그녀는 옆자리 선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내 쪽을 스치듯 보았다. 눈이 짧게 마주쳤다가, 곧 다시 돌아갔다.
나는 식판을 들고 이동했다. 거리 3m. 사람들 틈 사이로 각도를 좁히면 충돌 확률을 줄일 수 있다. 충돌 회피 성공. 그녀 앞에 멈췄다. 목소리의 음량을 급식실 소음 대비 10% 높였다.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윤아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놀람 반응. 곧 입구리가 올라가며 얇게 웃었다. “아… 미안. 나 오늘 선미랑 약속했어.”
문장은 간단했다. 거절. 정보로 분류하면 1비트. 선택 불가 상태를 명확히 알리는 신호. 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내 목소리는 평평했다. 진동수의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들의 동선을 열어 주었다. 윤아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지나갔다. 선미가 내게 손가락으로 짧게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15도 각도로 내려 응답했다.
사건 종료. 이론상으로는 아무 문제없다. 약속 → 우선순위 결정 → 나는 대기 또는 다른 선택. 효율적이다. 감정이 필요 없는 분기다.
그런데, 식판이 갑자기 평소보다 무거워졌다. 실제 질량은 동일(추정 780g). 손목 굴곡 근육에 미세한 긴장이 증가했다. 나는 즉시 원인을 점검했다. 혹시 국을 과다 담았는가? 아니. 찬의 부피는 평균값. 그러면 손의 힘 배분 오류? 아니면—
나는 분석을 중단했다. 지금 필요한 건 좌석 선택이다. 급식실 중앙 쪽은 소음이 크다. 가장자리 창가 쪽이 안정적이다. 창가 쪽 빈칸 하나. 의자와 의자 사이 간격 46cm. 식판 너비 33cm. 충분하다.
걸음을 옮기려다 뒤를 한 번 더 보았다. 윤아와 선미는 나란히 트레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선미가 무언가를 말하자 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그들의 선택 바깥에 있다. 선택 밖의 대상은 단순 환경으로 취급된다.
나는 속으로 정리했다.
“시도: ‘같이 먹자’ 제안.
결과: 거절(사유: 선약).
해석: 충돌 없음. 이상 없음. 감정 필요 없음.”
의자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숟가락을 집었다. 금속이 식판 가장자리를 스칠 때 특유의 얇은 소리가 났다—핑. 국에서 김이 올랐다. 숟가락을 국에 넣었다가 다시 빼는 데 1.2초. 입으로 가져오려다 멈췄다. 이유는 불명. 다시 시도. 이번엔 2.0초. 뜨겁지도 않은데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급식실의 소음은 여전했다. 웃음, 접시, 의자 끄는 소리. 그런데 소리 사이에 얇은 빈칸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내 자리 주변으로만.
“문제없습니다.” 나는 아까 그렇게 말했다. 맞는 문장이다. 그런데 그 문장이 내 입에서 나올 때보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될 때 더 무겁게 들렸다. 같은 문장인데, 무게가 달라졌다.
나는 다시 데이터로 적응하기로 했다. 숟가락—밥—국—반찬. 순서를 정하면 된다. 규칙은 언제나 안정을 만든다. 왼손으로는 식판을 미세하게 돌려 각도를 교정했다. 12시 방향에 밥, 3시 방향에 반찬, 6시 방향에 김치. 완벽한 배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칸이 비어 있는 느낌이 남았다. 실제 빈칸이 아니라, 좌석의 반대편. 그곳에 누군가 앉을 수 있었던 자리.
나는 그 빈칸을 3초간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입술 안쪽으로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한 번 더.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밥알의 온도는 적정, 질감도 양호. 그런데 삼키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 연하 반응 지연. 단순한 생리 현상일 수 있다. 혹은— 나는 그다음 단어를 적지 않았다. 기록은 아직 이르다. 2절에서 검증할 수 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깨 힘을 뺐다. 등은 곧게 펴고, 눈을 식판에 고정했다. 규칙대로 씹고, 규칙대로 삼킨다. 감정은 개입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게 결정했다.
그런데, 귀 안쪽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문장이 떠올랐다. ‘같이 먹자’— 내가 방금 처음 사용해 본 문장. 내 말이었다. 남의 말이 아니라.
그 문장이, 김처럼 천천히 올라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급식실 가장자리, 창문 가까운 빈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내는 마찰음이 순간적으로 크게 울렸다.
옆자리의 아이가 힐끔 쳐다보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앉자, 내 주변은 넓게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았다.
두세 명이 모여 숟가락으로 반찬을 바꿔 먹거나, 같은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소리의 데시벨은 평균 72 정도.
급식실 특유의 반향 때문에 더 크게 들렸다.
그러나 내 앞자리, 내 좌석 반경 1m 안쪽은 조용했다.
의자가 채워지지 않은 자리 두 개가 그대로 비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빈칸이라 기록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떴다.
밥알은 김에서 수분이 날아가며 표면이 조금 굳어 있었다.
나는 씹고 삼켰다.
평소라면 20회 정도 씹은 뒤 삼키는 것이 습관인데, 이번에는 12회에서 삼켰다.
목을 통과하는 속도가 둔했다.
삼킨 뒤, 식도가 잠시 막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즉시 분석했다.
“소화기계 이상 없음.
체온 정상.
심박수 안정.
그러나 식욕 저하.”
논리적으로는 병리 현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숟가락을 다시 들어 올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늦어졌다.
옆쪽 테이블에서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야, 네가 그랬다며!”
“진짜냐고! 하하하!”
식판을 치는 소리가 나고, 콩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따라왔다.
나는 소리의 원인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웃음이 내 공간에 공명하지 않았다.
내 자리만 다른 음향 장치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주변은 분명 시끄러운데, 나에겐 고요가 내려앉았다.
빈자리가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공간을 둘러싼 듯한 느낌.
숟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짧은 금속음—팅.
나는 눈을 들어 급식실 전체를 스캔했다.
윤아와 선미는 저쪽 창가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둘은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내 쪽을 향하지 않았다.
나는 논리적으로 결론을 냈다.
“그들의 대화 주제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내 반응은 필요 없다.”
그러나 밥은 더 이상 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떠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3초간 망설임. 평소의 행동 패턴과 달랐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선언했다.
“나는 감정이 없다. 거절은 단순한 선택지의 분기일 뿐이다.”
그 문장은 분명 정확했다.
그러나 입술이 뱉어낸 순간, 속에서 또 다른 문장이 아주 작게 따라왔다.
“…그런데 왜 밥맛이 없지?”
나는 그 문장을 곧바로 지워버리려 했지만, 이미 뱃속에서 허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허기 없음 = 정상 상태.
그럼에도 공복감이 아닌 다른 빈칸이 자꾸만 자리를 차지했다.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급식실의 소음이 다시 귀를 메웠다.
그러나 내 자리 위로는, 기묘하게도 조용한 공기만 내려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복도는 다시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사물함 문이 닫히는 소리,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발소리, 군데군데서 들리는 웃음.
나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복도 끝을 걸었다.
식판은 이미 반납했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손가락 끝이 여전히 식판을 쥔 것처럼 습기 어린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앞쪽에서 윤아와 선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윤아는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하다가,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으로 정리했다.
“사건 종료.
거절은 이미 해결됨.
대화 필요 없음.”
그래서 그냥 지나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이 스스로 멈췄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문장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나를 피하고 있습니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 놀랐다.
분명히 점심시간에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사건을 종료한 사람이 왜 다시 회상을 호출하는가?
윤아는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았다.
“아니. 그냥… 너 오늘 좀 이상하네.”
그녀의 말은 공격도,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솔직한 관찰 같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이상하다’라는 단어만이 부각됐다.
나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아까 괜찮다고 말했는데…”
내 속에서 두 문장이 충돌했다.
괜찮다 = 논리적 결론.
묻는다 = 감정적 미련.
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이 말을 꺼낸 건,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내 마음이 아직 그 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아는 선미와 눈을 마주친 뒤, 가볍게 웃으며 “수업 늦겠다” 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대로 복도에 서 있었다.
사건은 종료됐는데, 나 혼자만 종료하지 못한 것처럼.
공책을 꺼내어 벽에 기대 메모했다.
“나는 ‘괜찮다’고 발화했음.
그러나 이후 ‘왜 피하느냐’고 질문함.
스스로 모순.
논리적 해석: 불필요 반복.
감정적 해석: 사건이 종료되지 않음.”
펜 끝이 종이를 두드릴 때 손목에 작은 떨림이 있었다.
이상했다. 보통 사건 기록은 명쾌하다.
시작, 과정, 결과, 종료.
그런데 오늘 기록은 종료선 뒤에 작은 잔여물이 붙어 있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 감정은, 종료를 거부한다.”
복도의 소음이 점점 교실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자리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윤아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시선 속에서만 가까웠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일제히 교실로 흘러들어왔다.
책상다리를 끄는 소리, 의자에 몸을 던지는 소리, 연필을 꺼내는 잡음이 교실을 채웠다.
나는 교과서를 펴고 노트의 여백을 정리했다.
평소처럼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 규칙적인 절차.
집중을 방해할 요소는 없었다—적어도 논리상으로는.
하지만 시야의 한쪽 끝에 자꾸만 윤아의 옆모습이 걸렸다.
머리를 넘기는 손동작, 고개를 숙이며 필기하는 자세.
나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노트 위에 고정했지만, 불필요한 장면이 자동 재생됐다.
점심시간의 순간. “아… 미안, 선미랑 약속했어.”
그 짧은 문장이 아직도 내 귓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즉시 분석을 시작했다.
“사건 종료 = 선언 완료.
감정 없음 = 확신.
그러나 기억 반복 발생.”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빨라진 건 아니었지만, 글씨가 고르게 이어지지 않았다.
획의 간격이 흔들렸다.
내가 흔들린 건 손이 아니라, 머릿속 집중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친절을 시도했다. 거절당했다. 논리적으로는 이상 없음.”
그러나 곧 이어진문장이 스스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지?”
기억은 단순 데이터다.
보존, 삭제, 반복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기억은 삭제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윤아의 웃는 얼굴, 짧은 미안의 말, 그리고 그 옆의 선미.
논리적 오류는 없는데, 장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걸 느꼈다.
교사의 목소리는 파형만 남고 의미는 사라졌다.
단어는 입력되었으나,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계속 반복되는 짧은 대화의 파편이었다.
책상 위 노트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기억 = 단순 정보.
그러나 이번 기억 = 감각 동반.
눈앞 반복 → 감정적 잔상 추정.”
적고 나서 펜을 내려놓았다.
내 몸은 수업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급식실에 머물러 있었다.
논리로는 이미 끝난 사건인데, 감정은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윤아 쪽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사실이 이상하게도 멀어짐처럼 느껴졌다.
물리적 거리는 3m.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그 거리가 수십 미터처럼 늘어나 있었다.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 감정은, 거리를 만든다.”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기울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 붉은빛이 방 안을 비스듬히 채웠다.
책상 위에는 오늘 아침에 풀다 만 수학 문제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연필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의 기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차지한 건 점심시간의 짧은 대화였다.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아… 미안. 나 선미랑 약속했어.”
“그렇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세 문장.
그게 전부다.
논리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다.
제안 → 거절 → 수용.
효율적이고 단순한 구조.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장면을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남은 미세한 열감이 여전히 내 의식을 자극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절은 개인의 선택이며, 나의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맞았다.
그러나 또 다른 문장이 속에서 솟아올랐다.
“하지만… 관계는 달라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 오후 복도에서 윤아와 마주쳤을 때,
나는 다시 묻고 말았다.
“당신은 나를 피하고 있습니까?”
그건 이미 종료된 사건을 되살린 셈이었다.
내가 종료를 거부한 건가, 아니면 감정이 종료를 허락하지 않은 건가?
나는 방 안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흰 셔츠, 약간 흐트러진 머리, 굳은 표정.
하지만 그 표정 속에서, 나는 묘하게 작은 흔적을 보았다.
‘작아진 나.’
오늘 급식실에서 비어 있던 자리처럼,
거울 속 나 역시 조금은 빈자리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를 거절했고, 나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데 이후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이상했다.
사건은 단순했는데,
그 단순한 사건이 하루 전체의 공기를 바꾸었다.
교실에서의 대화, 복도에서의 시선, 수업에서의 집중.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시 정리했다.
“거절 = 선택.
상처 = 없음.
그러나 관계 = 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 사이로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 거리감.”
물리적 거리는 줄자로 잴 수 있다.
윤아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교실에서 3m, 복도에서는 1.5m.
그러나 오늘 느낀 건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한 문장이 오간 뒤, 그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겼다.
그 틈은 줄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
나는 그것을 처음 자각했다.
밤이 깊어졌다.
스탠드 불빛이 책상 위 작은 원을 만들었다.
나는 오늘의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수첩을 펼쳤다.
펜 끝을 종이에 대자, 잔상이 즉시 떠올랐다.
윤아의 얼굴, 짧은 미안의 웃음, 그리고 내 대답.
“괜찮습니다.”
나는 곧장 기록을 시작했다.
작성자: 이천재 (13세)
주제: 거절
1. 사건 기록
점심시간: 정윤아에게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제안.
그녀의 대답: “미안, 선미랑 약속했어.”
나의 대답: “괜찮습니다.”
이후 혼자 식사. 식욕 저하 발생.
복도에서 재차 대면 → 내가 “당신은 나를 피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
그녀의 대답: “아니, 그냥… 너 오늘 좀 이상하네.”
수업 중 집중도 하락. 윤아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시야에 개입.
집에서 복기 시, ‘상처 없음’이라 선언했으나, 관계의 변화를 자각.
2. 분석
거절 = 타인의 선택. 나의 오류 아님.
그러나 ‘괜찮다’ 선언 후에도 기억이 반복.
논리적 종료 불가.
감정은 사건을 ‘종료하지 않는 잔여물’로 남김.
감정은 논리적 해석을 거부하고, 논리 없음 자체를 보존함.
3. 신체 반응
식욕 저하, 손가락 끝 긴장, 집중력 저하.
목 뒤 간질거림, 가슴 압박감.
감정 부정 선언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증상 강화.
감정은 언어적 선언과 무관하게 지속됨.
4. 결론
거절은 실패가 아님.
그러나 관계에 거리감이라는 변화를 남김.
감정은 ‘논리 없음’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존재.
오늘 나는 처음으로, 관계가 나를 바꾸는 경험을 했다.
펜을 내려놓고 한동안 수첩을 바라봤다.
문장들은 단정했지만, 내 안은 단정하지 않았다.
논리로 닫은 문 뒤에 여전히 미세한 틈이 남아 있었고,
그 틈으로 낮의 장면이 계속 새어 나왔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접근했고, 실패했다.
그녀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하루 종일 피했다.”
그리고 줄을 바꿔, 한 단어를 크게 적었다.
‘거리감’
수첩을 덮자, 방 안은 고요해졌다.
그러나 내 안은 여전히 복도처럼 시끄러웠다.
‘괜찮다’고 했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괜찮지 않았다.
나는 스탠드를 끄며 속삭였다.
“감정은… 논리를 남기지 않는다. 그냥,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