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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Feb 27. 2020

[제멋대로 영화보기 #12] 1917

에둘러 보아도 끔찍한 전쟁이어라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총탄이 난무하고, 이곳저곳에서 포격이 터지며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아비규환. 전쟁의 참혹함은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자연환경 역시 헤친다. 그리고 극도로 긴장된 상황을 이끌어내는 전쟁은 간접 체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시킨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소설, 게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쟁 관련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콘텐츠들을 처음 접했을 땐 웅장한 스케일과 박진감에 끌렸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피로해졌다. 마찬가지 이유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공포/스릴러 장르의 영화는 전쟁 영화와 비슷하게 공포와 스릴을 선사하지만 다양한 소재와 색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변주가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스케일이 큰 대신 보여주는 게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1917>도 이 범주에서 별 반 다를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영화에 대한 호평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번 아카데미에서 <기생충>이 탄 작품상의 가장 큰 라이벌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전쟁 영화를 비선호하는 필자를 코로나의 위험도 뚫고 영화관으로 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1917>은 전쟁 영화에서 나오는 그림은 다 비슷비슷할 것이라는 필자의 오만한 편견을 깨 주는 훌륭한 영화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4월의 어느 날 영국군의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은 독일군의 후퇴가 함정을 파놓은 전략적 후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전선에 나가 있는 '매캔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미 독일군이 통신망을 끊어버린 뒤였다. 결국 매캔지 중령이 이끄는 1600명의 병사가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는 일이 없기 하기 위해선 누군가 직접 소식을 전하러 위험한 전장을 뚫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위험천만한 특명을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가 받는다. 블레이크는 친형이 매캔지 중령의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뚫고 임무를 수행할 동기부여가 충분한 상황이었고 스코필드는 그냥 친구라 어영부영 같이 가게 된다.


 줄거리만 살펴봐도 기존 전쟁 영화의 느낌 하고는 다르다. 상황은 전쟁이지만 그 안에서 개인이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미션 임파서블>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종일관 두 명의 병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를 비추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게임을 하는 것 같은 카메라 구도이다. 몇몇 장면은 저번 글에 소개한 <버드맨>의 롱테이크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나무 기대 쉬고 있던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부름에 일어나 특명을 수행한 후 수미상관으로 다시 나무에 기대 쉴 때까지 한 호흡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두 병사의 미션 수행이 주요 소재이다 보니까 영화 내에서 피가 낭자하는 대규모 전투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총격전을 비롯한 액션 장면도 전쟁 영화치곤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화의 스케일이나 영상미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사람이 대규모로 치고 박는 장면이 없을 뿐이지 전쟁의 참혹함은 영화 내에서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철조망에 걸리고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까마귀의 밥이 돼버린 시체들, 커다란 쥐가 득실 되는 어두컴컴한 지하 토굴, 강물에 퉁퉁 불어 부패되어가는 시체들 등등 끔찍한 장면들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 드러난다. 끊어진 다리, 잘린 체리나무, 전쟁의 흔적을 간직한 벌판 등등 영화 속에서 구현된 배경 이미지들의 영상미도 훌륭하다. 너무 리얼하게 만들어놔서 진짜 그 시대의 전쟁을 경험하는 듯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단 영국 감독인 '샘 맨데스'가 만들어서 그런지 독일인을 비인간적으로 그려낸 부분이 존재한다. 때문에 스코필드의 친구이자 친형을 구하려는 의지가 충만한 블레이크는 비열한 독일인 손에 생각보다 일찍 목숨을 잃는다. 유럽 역사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나라 민족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잊지 않고 있는 것처럼 영국인들 입장에선 독일인이 그런 존재일 거라 생각하면 독일인에 대한 악마 같은 묘사는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리고 실제로 더 심하게 묘사된 영화가 많기도 하다.    


 대규모 군대처럼 눈에 보이는 위협이 화면 속에 드러나진 않지만 '적이 언제 튀어나올까?', '어떤 부비트랩을 설치했을까?'처럼 드러나지 않은 위협들 때문에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이 넘친다.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포복을 하고 때로는 지형지물을 통과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은 액션/어드벤처 장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 중간중간 긴장을 풀어주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블레이크의 죽음 이후 다른 전장으로 향하는 아군의 부대를 마주친 장면과 독일군이 점령한 마을에서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는 아이와 숨어 지내는 여인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전쟁에 무감각해지고 어디론가 매번 끌려다니는 병사들의 비애, 그리고 민간인의 비애를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좀 아쉬운 장면들이었다. 마치 스코필드의 모험의 번외 에피소드처럼 중간중간 '전쟁에선 이런 상황도 펼쳐진답니다'라는 식으로 나열해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초반에 필자가 말했던 기성 전쟁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물론 조금 아쉬웠을 뿐이지 전체적인 만듦새도 훌륭했고 완급조절을 위해 넣어야 했던 장면이라고는 생각한다.

 


 이 특명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얼굴은 낯설다. 조지 맥케이는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 '비고 모텐슨'의 첫째 아들로 출연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고 딘-찰스 채프먼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조지 맥케이는 배우가 가지고 있으면 좋을 인상적인 마스크를 지녔다. 무엇보다 군인 역할에 배우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의 무념무상한 마스크는 전쟁의 참혹한 풍경에 더해져 더욱더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해준다.

 '콜린 퍼스'나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팬들은 아쉬울 수도 있다. 영화는 거의 조지 맥케이가 연기한 스코필드의 원맨쇼이기 때문에 <킹스맨>과 <어벤져스> 시리즈로 국내 팬들을 많이 보유한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마크 스트롱 등 유명 배우들의 분량은 지극히 적다. 조연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거의 까메오처럼 등장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병사들의 호연과 흥미진진한 상황만으로도 충분하다. 중간중간 출연하는 유명 배우들은 좋은 양념처럼 영화의 풍미를 더해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빠져나온다.   


 처음엔 친구 블레이크의 손에 끌려 대책 없이 임무에 나섰고 초반부터 모진 일을 겪으며 도대체 나를 왜 데려온 거냐며 불평한 스코필드지만 블레이크의 죽음 이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의 병사로 변모한다. 스코필드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 같진 않다. 과거 전투에서 받은 훈장을 프랑스 병사의 와인 한 병과 교체해버렸을 정도로 그에게 명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그저 전쟁을 마치고 살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 그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건 동고동락을 함께한 블레이크에 대한 전우애였다. 그렇다면 임무를 마치고 난 스코필드는 애국심이 고취된 참 군인으로 성장했을까? 그의 씁쓸한 표정을 보면 그런 결말의 영화는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성취감보단 오히려 아끼던 전우를 잃은 슬픔과 허무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직 스코필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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