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명절 증후군, 크리스마스 블루스

크리스마스 마켓과 함께 떠나보내야 하는 감정들

by 문맹

크리스마스 선물을 25일 아침에 개봉하는 미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독일 가정에서는 선물상자를 하일릭 아벤트(Heiligabend)라 불리는 24일, 즉 크리스마스이브에 연다. 근사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온 가족이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에 모여 선물개봉식을 거행하는데 짧게는 2, 30분에서 식구가 많으면 2시간까지 걸린다. 선물을 열고는 예상치 못한 혹은 기대하던 선물에 대한 기쁨을 한껏 표현하고, 그 모습을 보며 서로 즐거워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서로 포옹하고 양 뺨에 키스까지 해야 하니 금세 끝나지 않는다. 몇 명이 모였든지 간에 한 사람도 빼놓지 아니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가며 누가 준 선물인지를 확인하고 놀람과 즐거움, 고마움을 표현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선물상자를 대차게 팍팍 뜯어 풀고 단순하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선물이 옷인 경우는 가족들 보는 앞에서 런웨이를 하고, 십 대 아이들이 있어 아이패드나 핸드폰을 선물한 경우 언박싱 비디오까지 찍게 되기에 선물 개봉식은 늦은 밤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쿠키 굽는 중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대 놓고 풀어보며 기뻐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는 처음에 독일식 크리스마스 선물 개봉 방식이 당황스러웠다. 선물을 받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본 경험이 철없는 12살에 멈춰서 그렇기도 하고 12살 이후에 받은 선물은 준 사람 앞에서 바로 풀어본 경험이 흔치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이 독일식 크리스마스 선물 개봉식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를 생각해서 주는 선물은 당연히 고맙고 기쁘지만 받은 선물을 정성스럽게 풀고 그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족, 친지, 어떤 경우는 친구들 앞에서 진지하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내게 모두의 관심이 순식간에 쏠려 무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을 애써 잠재워야 했고, 성탄에 이 많은 선물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마음을 장착하게 되기까지 인고의 시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에 왜 어른들까지도 선물을 받아야 하는가부터 시작해서 대체 선물이란 무엇인가까지 철학적(?)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내가 그동안 탑재하고 있던 지극히 물질적인 교환, 아니 심지어 현금 교환으로도 가능했던 선물에 대한 세속적 개념을 새로운 성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종교적 정서를 갖춘 행위로 탈바꿈시켜야 했던 것이다. 문화의 영향이란 강력한 것이어서 그런지 나를 닮아 성질 급하고 좋은 것을 보면 급흥분하는 우리 애들조차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푸는 것만은 독일 버전으로 배워서 그런가 어렸을 때부터 참을성 있게 개봉 잔치를 즐길 줄 알게 된 것이 신기하다.


일련의 선물개봉식이 끝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에 만족하고 기뻐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장만하는 것을 12월의 낙으로 생각하는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돈으로 주거나 상품권으로 주는 혁신적인(?) 방법을 아직까지 많이들 거부하고 직접 선물을 생각해서 주다 보니 취향이나 사이즈가 맞지 않아 교환해야 하는 경우, 때로는 똑같은 선물을 두 개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선물을 줄 때 영수증이나 교환권을 넣어주는 것이 결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휴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27일부터 백화점에나 상점에는 선물을 반품하거나 교환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독일 사람들은 받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에게 다시 선물하기도 한다. 재선물 할 때에는 숨김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음을 밝히고 자신은 쓰지 않겠지만 당신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준다고 당당히 밝힌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필요 없는 물건을 집안에 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째로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금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의미 있고 지속가능한 것으로 선물의 형태를 바꾸는데 예를 들어 나무 심기 선물권이나 유니세프에 상대의 이름으로 기부한 후 기부증을 주는 것을 들 수 있다. 나무 심기 선물권의 가격은 한 그루를 선물하면 5유로부터 시작해서 선물 단위가 4그루, 11그루, 22그루 등이 있다. 최대 440그루까지도 선물이 가능한데 가격이 660유로에 달한다. 440그루면 숲을 만드는 것인데 이 정도 가격은 당연하지 싶다. 나무 기증 선물을 하면 증서를 받게 되는데 증서에는 "로타가 폴을 위해 크리스마스에 나무를 심었다"라는 글귀와 함께 좌표로 정확하게 어디에 나무가 심길지도 표기되어 있다.

certificate.png 사진 출처: planet-tree.de


나무뿐 아니라 여러 가지 기부를 통한 선한 크리스마스 선물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 학교를 건립하는 데 기부, 난민을 위한 기부, 환경을 위한 기부 등 크리스마스 선물을 지속 가능하고, 인간뿐 아닌 자연과 환경에까지도 좋은 일이 되는데 활용하고 있으니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만 하고 나는 여태껏 계속 탄소를 배출시키는 선물을 하고 있어 문제인데 내년이면 모든 자식들을 독립시키게 되니 이제 나도 애들 핑계 그만 대고 크리스마스에 나무를 심어야 하지 싶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마켓이 한가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도 나가보니 뒤셀도르프에 연말을 보내러 관광온 사람들을 위시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주전부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백화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아마도 교환 및 반품을 하는 사람들과, 크리스마스에 받은 용돈을 탕진하러 나온 젊은이들과, 마지막으로 50프로 세일이 넘치는 이 기간에 살림을 장만하러 나온 알뜰족들의 행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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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www.ruby-hotels.com & www.antenneduesseldorf.de

연말이 지나면 마켓은 감쪽같이 그 자취를 감추고 2024년을 맞이하게 될 터인데 12월 한 달을 기다림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 준 마켓을 훌쩍 떠나보내기가 벌써 아쉽다. 물론 마켓을 보내기 전 독일인들에게는 또 한 번의 축제가 남아 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날 즉 12월 31일 날 벌이는 실베스터 파티라고 불리는 연말을 맞이 기념비적 이벤트이다. 실베스터(Silvester)는 314년부터 335년까지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었던 성인의 이름인데 성 실베스터의 장례식이 335년 12월 31일로 지정된 것과 새해전야라는 시간이 결합되면서 이 전통이 생겼다. 실베스터 파티는 1월 1일이 공포되면서 대규모 불꽃놀이와 소형 폭죽을 터뜨리면서 시작되는데 큰 도시든 작은 마을이든 상관없이 공공장소의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불꽃놀이들이 새벽 내내 계속된다. 연말이면 슈퍼마켓에서 박스로 파는 폭죽을 구매해서 공터에서 터뜨리느라 난리인데 그 덕에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새벽 시간에 온 동네의 개와 고양이들은 지옥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이렇게 실베스터 파티로 한껏 고조된 연말을 보내고 나면 1월 초에는 대대적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의 부스들을 거두어 내고, 연말 파티에 쓰고 남아 뒹구는 폭죽의 꽁초를 치우는 일만 남는다. 도시는 내장을 드러낸 생선처럼 휑해지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섰던 자리는 다시 널따랗게 자전거 길이 트이고 부산하게 출근하는 사람들과 아침 조깅 하는 사람으로 들어찬다.


커다란 흥분과 기쁨의 도가니가 가라앉고 다시 모터를 돌려 생산적인 일에 힘을 쏟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우리가 명절 증후군을 앓듯 크리스마스 블루스를 겪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블루스란 크리스마스 휴일과 연말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찾아오는 일련의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그 감정의 정체는 슬픔과 외로움, 실망감 등의 집합체이다. 크리스마스 휴일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워야 하고 축하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 기간에 동일한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성탄이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상상하지만 사실 현실은 이러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게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 생긴 기쁨보다 갈등이 더 컸을 수도 있고, 남들은 다 가족들과 모여 있는데 혼자 남아 외로움이 오히려 더 증폭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요, 재정적인 문제로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내지 못했거나 선물을 주고받고 음식 장만에 데코레이션을 하거나 여행 경비를 대느라 다른 달보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 스트레스가 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와 과도한 감정소비로 진짜 크리스마스가 왔을 때는 오히려 실망하고 지치거나 지나친 소비로 인한 부담과 불안이 커져서 연휴가 끝났을 때 일상으로 복귀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비해 가족의 형태가 훨씬 다양한 독일은 이혼 가정의 경우 크리스마스에 엄마와 시간을 먼저 보내느냐 아빠와 시간을 먼저 보내느냐 등 함께하기 꺼리는 가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초대받은 저녁식사에 동등하게 참여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아침 라디오에는 젊은 커플들이 파트너의 부모에게 먼저 찾아가느냐 자신의 부모에게 먼저 가느냐로 실랑이를 부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혼한 가정도 마찬가지일 텐데 한 해는 친정집에 먼저 가고 다음 해는 시집에 먼저 가는 등 규칙을 정하느라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는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소개되었다. 복잡한 가족 및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감정적 소비와 우울감 외에도 독일에서는 겨울 날씨가 좋지 않아 계절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슬픔과 피로감이 크리스마스 블루스와 결합되어 더 악화되기도 한다. 특히 떠나간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오히려 그 상실을 상기시키는 시기가 된다. 이렇게 경미한 실망에서 슬픔까지 다양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기에 크리스마스 블루스의 후유증은 여러모로 폐해가 크다. 크리스마스 휴일이 기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론 크리스마스 블루스는 일시적인 감정일 뿐 임상적 병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연초부터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곧 크리스마스 마켓이 도려내지고 그간의 아기자기한 즐거움은 사라지고 도시는 훤하게 비워질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일상으로 복귀할지, 내년으로 넘어갈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또 작심삼일의 계획을 세우면서 내년을 맞이하지 싶다. 며칠간의 꿀 휴식으로 짧고 굵게 충전되어 마치 내년에는 새로운 인간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백지수표식의 to-do-list를 날려가며 새해를 맞이하고 1월 초부터 차례로 결심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여태껏 한해도 이 루틴에서 벗어난 적 없이 똑같은 방법으로 반세기를 살아냈다. (으그그 자랑이다)


그래서 올해는 나잇값 좀 하고 싶다. 마구잡이로 희망사항을 적어 벽에 붙여 외치는 식의 새해 결심이 아닌 앞으로 일 년 동안 나를 무엇으로 메꿀지 곰곰이 생각 좀 해보고 2024년을 맞이해 볼 지어다. 나의 작심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궁리를 해 볼터인데 그러려면...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일상이 지겨워서 배설하듯이 쓴 부족하고, 퇴고도 제대로 안된 글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따뜻한 격려와 과분한 관심을 베풀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 글을 쓰는 연말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 문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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