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아내가 휴대폰을 만지면서 무슨 말을 하길래 "당신, 나 불렀어요?"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니, 나 혼잣말한 건데요?"라고 했습니다. 어느덧 아내의 혼잣말에도 반응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아내와 함께 피식 웃었습니다.
결혼 후 지금까지 가장 자주, 많이 혼나는 아이템은 '대답하지 않음'입니다. 가족과 대화가 많지 않은 전형적 한국식 환경에서 자랐고, 부모님께서는 항상 이름을 불러 주셔서 그런지 아내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냥 지나쳐서 아내를 서운케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차 안에서 "날씨가 쌀쌀해졌네"라고 말하면 저는 속으로(!) '쌀쌀해졌나 보네'라고 생각을 하고 계속 운전을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여보, 들었어요?"라고 물어봅니다. 그제야 대답을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래도 나름 변명을 해보자면 아내가 호칭(여보, 오빠)을 부르면 반응을 잘합니다. 딸아이 출산으로 아내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이틀간 6인실 병실에 있었는데, 새벽녘에 앞 칸 산모가 남편을 부르며 '오빠'라고 했더니 제가 일어난 적도 있었으니까요.
몇 년이 지나서야 아내가 원한 것은 대답보다 반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나는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항상 대기모드 상태이다' 이런 거죠. 군대 시절 상관이 이름을 부르면, 제 물품을 만지기만 해도 관등성명을 읊던 생각이 났습니다. 상관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정신을 챙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인 거죠.
관등성명이 '전투 준비 완료'를 보여주는 첫 단추이듯, 아내의 한마디도 반응을 하는 것이 남편으로 해야 할 첫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어렵네요. :)
ps.
아내 분들께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1. 호칭을 붙여주세요. 그래도 대답을 안 하면 다시 불러주세요. 그래도 대답을 안 하면 그때 혼내주세요.
2. 평서문을 의문문으로 바꿔주세요. '날이 춥네'보단 '날이 춥지?'가 더 좋습니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하면 혼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