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있다면.
2016년 4월 2일. 함부르크.
독일 북부 지역의 날씨는 보통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내가 온 이후로 너무나 화창하기만 하다. 오늘은 독일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31일 오후 5시쯤, 동료들과 인사를 하고 마지막 남은 짐을 챙겨서 퇴사했다. 이별의 아쉬움에 젖어있을 틈도 없이 바로 짐을 싸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다. 그냥 혼자 가는 여행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짐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었다. 몇 번 만날지 모르지만, 꾀죄죄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상하의 맞춤으로 5벌의 옷을 챙기게 되었다. 거기에 4월 초 독일 날씨는 꽤나 춥다고 하여 외투까지 두세 벌 챙기고 나니 26인치 캐리어를 확장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신발도 세 켤레나...)
그녀와 처음 만날 때 입을 옷은 최대한 안 구겨져야 하기 때문에, 고이고이 개서 세탁소 비닐에 잘 싸가지고 캐리어 맨 위쪽에 넣었다. 20킬로가 살짝 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열차에 탑승.
4월 1일 새벽 1시, KLM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출발했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 대기시간까지 합쳐서 총 17시간에 가까운 비행을 거쳐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독일 시간으로 정오가 되었다. 그녀와의 약속은 일부로 둘째 날 잡았다. 장시간 여행을 거치고,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롯이 주어진 하루의 시간.
차는 없지만 차에 관심이 많은 나는 기차를 타고 폭스바겐 그룹의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로 무작정 떠났다. 그곳에서 폭스바겐 테마파크인 아우토슈타트를 신나게 구경하고,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드디어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
약속은 오후 12시 반이었지만, 시차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아침 7시 반에 깼다. 그리고는 중앙역으로 나갔다. 간단히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사면서 중앙역의 꽃집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하에 괜찮아 보이는 꽃집이 있었다. 아직 문을 안 열었지만, 아마 점심때쯤엔 열었으리라 생각하며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짧은 잠을 청하고 다시 11시쯤 일어났다.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도착하자마자 잘 펴서 걸어놓은 옷을 입고 머리를 만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은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소개팅에 나갈 땐 항상 약간의 궁금함과 약간의 설렘을 갖게 되지만, 머나먼 독일에서의 소개팅이라니. 이건 나에게도 참 특별한 경험임에 분명했다.
12시쯤 역에 도착해 아침에 봐 놓은 꽃집으로 향했다. 아마도 튤립이 가장 제철인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카운터 앞에 놓인 보라색 튤립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 송이에 1유로. 다섯 송이의 튤림을 포장했다. 그리고 그녀와 만나기로 한 중앙역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사진으로만 봤던 그녀가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J씨.
- 아, 안녕하세요!
- 반갑습니다. 연락드렸던 K예요. 자 여기...
- 어머, 이게 뭐예요?!?!
- J씨 드리려고 산거예요. 이 꽃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 어우... 어떻게 해... 저 보라색을 제일 좋아하는데... 너무 감사해요. 너무 예뻐요...
그녀가 보라색을 제일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녀가 이전에 보라색을 좋아했든 싫어했든지 간에, 오늘부터 이 꽃을 계기로 보라색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 없지 않은가.
우리는 점심때 얇은 독일식 피자와 슈니첼을 먹고, 자리를 옮겨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독일 오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서 이미 카톡으로는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혹시 독일까지 찾아오겠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거리낌 없고 친근한 그녀의 태도에 나도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마음으로 독일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서 각자가 하는 일,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 사람이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내 이상형 그 자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부분을 이해하시기 위해선 28. 이상형에 대하여 이 글을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외모적인 부분이야, 페북 사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한 거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독일에서 독어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어학 중에서도 음운론 쪽이 아니고 효용론 쪽을 공부하고 있었다. 특히 미디어와 정치분야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내 전공이 바로 미디어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루는 '언론정보학'. 나 역시 평소에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아 그 부분에 대해서 평소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나누기엔 좀 웃긴 주제이긴 하지만, 각자가 경험하고 생각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난 대선의 슬로건들, 사람들의 반응, 이번 총선의 전개 방향, 독일 정치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한국과 독일의 차이점과 공통점 등등, 우리는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고, 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 했다. 더군다나 그녀와 나의 정치적 성향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 오빠, 제 평생 제 전공에 대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녀는 거의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데, 또 신기했던 건 아버지께서 호남 출신이고, 바로 지금, 내 고향인 광주로 발령이 나셔서 부모님께서 그곳에 살고 계신다는 사실.
게다가 광주 부모님 댁에는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강아지 두 마리가 있다고 한다. 서로 키우는 강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이 나서 각자의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을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녀석들 덕분에, 그녀와 나의 공감대도 깊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저녁에, 내가 예전에 썼던 부모의 마음, 십 분의 일쯤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이 글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답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홀로 독일에 와서 타지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열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땠을까?
대화하면서 그녀의 이상형은 교회 다니는 사람, 담배 안 피우는 사람,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전공에 대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그녀의 이상형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본인을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서 독일로 왔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기쁘다고. 그렇게 용기를 내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와 거의 4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다음 주 월요일부터 독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하는데 준비할 게 많아서 저녁은 먹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독일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어학 강의라니!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푹 빠졌다.
그녀를 바래다주러 역으로 가는 길.
- 근데 오빠, 제 생일이 언제인지 아세요?
- 음... 아니요?!
- 한 번 맞춰보세요.
- 어... 글쎄요~ 혹시 여름?
- 맞아요~
- 와, 나도 여름에 태어났는데. J씨도 혹시 8월에 태어났어요?
- 네.
- 오, 대박. 며칠인데요?
- 맞춰보시라니깐요~
- 엥... 설마... 에이 설마... 16일?!?!
- 맞아요! (웃음)
- 헉. 진짜요?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 네, 진짜로. 저는 페북에서 보고 오빠 생일 알고 있었어요. 근데 우리가 생일이 같다는 걸 알고 저도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저는 언제나 제 삶에 운명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빠, 우리 정말 운명일지도 모르겠어요.
-
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