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좋은 것을 말해야 하는, 글로 남겨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요?
올해 한 독서모임에사 받은 질문이다.
나는 이제 이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걸 좋다고 솔직하고 순수하게 말하는 사람이 좋아요”
누군가가 '왜요?'라고 묻기에 조금 더 생각하다가 나온 내 답변이 나도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 걸 쉽게 말할 것 같은데 사실 좋은 걸 좋다고 말할 때 더 많은 두려움이 따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다는 마음을 잘 먹는 사람을 보면, 또 그걸 올곧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저도 좋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는 사람, 좋아하는 걸 말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사람, 좋아하는 걸 하면서 빛나는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좋다고 마음 먹기 조차 힘들다.
좋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잘 모르겠을 때가 많다.
좋다는 게 뭘까?
우리는 보통 익숙하게 쓰는 단어를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사용한다고 믿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이런 단어들은 해체해 보면서, 개개인의 언어로 풀어보면서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정의해 보기엔 단순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좋다고 하기엔 모자라고 모호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할 때 이유는 모르겠는데 디자인이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좋을 때가 있었다.
대학 전공의 카리큘럼이나 미디어나 대외활동에서 다루는 방식으로 미루어볼 때 역사학과 디자인/콘텐츠 그 두 가지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때 나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그럼 뭐지?' 같은 혼란에 빠졌었다
그러기 시작하자 당연히 확고하게 좋아하게 하는 줄 알았던 역사학은 좋아하면서도 한계가 보여서 미워지기도 했고, 디자인이나 콘텐츠는 내가 배워본 적도 없는데도 어느 정도 하는 것 같고 인정도 받으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하면서도 전공자랑 비교했을 때는 부족하다는 막연한 생각에 좋지만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또 이렇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식으로 혼란스럽게 좋아하는 게 진짜 좋아하는 게 맞나 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문제,
나는 무엇을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걸까요?
이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마음 모두 '좋다'는 마음이라는 걸 안다. 나는 역사학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다른 방식과 다른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다.
'좋다'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좋다는 마음을 일처일부제 다루듯이 다루는 사회풍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사람이든 직업이든 취향이든 취미든 하나가 좋다고 선언하고 나면 그 좋다는 말을 하나로 단정짓고 나아가는 게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나는 아직도 쉽게 좋아하는 걸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좋다'를 정의한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김이나 작사가님의 정의다.
이 정의를 보고 나서 나는 '좋다'는 말이 데려가주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역사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세상의 이야기를 깊이 알 수 있었고, 기록이나 이야기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때문에 내가 사는 시대에도 좋은 이야기들이 오래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것 저것 빠르게 찾아보고 만들어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기록과 이야기를 가치를 잘 알리고 보여줄 수 있었다.
좋아하기로 하고 진로나 직업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는 그 두가지를 좋아하는 게 모순 같아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역사학을 좋아해서 배우지 않았다면 잘 알리거나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을까 싶다. 하다보면 계속 좋은 욕심이 생긴다. 그렇게 잘 알리고 보여주는 일을 좋아하게 되니 세상의 이야기를 더 많이 찾아다니기도, 잘 알리고 보여주는 다른 방식을 찾기도 거기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신문사를 다니기도, 박물관이나 교육청이나 도서관에서 일하기도, 동네 시람들이 많이 다니는 빵집에서 일하기도, 배리어프리 야행사를 다니기도, 지역의 역사잡지를 발행하기도, 일을 하는 사람을 위힌 뉴스레터를 발행하기도, 그저 일상에서 쉴 때 편안히 들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채널의 주인장이 되기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콘텐츠를 에디팅하거나 목소리 녹음을 하기도, 청년의 날 행사의 사회자를 맡기도, 브랜딩을 하기도, 조직문화 프로젝트를 하는 팀에 가기도, 유네스코에서 일하기를 선택하기도 했다
역사학과 디자인과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좋아해서 만난 세계의 일부만 늘어놔도 이리 좋은 일이 많다.
이제는 혼란스럽지가 않다.
오히려 이 모든 맥락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 관심 가지는 것에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때 마음이 편하다.
심리학에는 이행기라는 게 있다고 한다.
무언가를 얄정적으로 좋아하는 시기는 다음 것을 좋아하기 위한 하나의 이행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좋아했던 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걸 품고 다른 걸 더 잘 좋아할 수 있는 것이란다.
결국 더 중요하게 해야 할 과제는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게 왜 좋은지 내 안어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것을 좋아하는 내 태도나 방식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 그리 많이 말하는 ‘나다움’이란 건 삶을 바꿀 엄청난 경험이나 대단한 것을 좋아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겪은 경험과 내가 이미 좋아하는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할 때 생긴다. 현실 위에 단단히 서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가장 엄청나고 대단하다.
이제는 좋다는 마음에 여러 가지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데 미울 수도 있고, 표현하고 싶은데 품고 싶을 수도 있고, 좋은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어서 좋은지 몰랐지만 오랜 시간 내 눈에 밟혔으니 좋구나 인정할 수도 있고, 그냥 붕 뜨게 좋을 수도 있는거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좋다는 마음에 너무 많은 혼란을 느겨왔다.
좋아하는데 미울 수도 있고. 미운데 좋아할 수도 있는 이런 식의 말장난 같은 모순이 좋아하는 마음이 될 수 있나하며 그 이상한 괴리와 자기분열적인 감정에 괴롭기도 했다.
근데 어느 날 괴로워하는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내가 모순을 알아차리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는 어떤 것에 대한 속성을 하나로만 단정 짓지 않고 여러 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고, 거기에 대한 감정 하나 하나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다보니 작든 크든, 무언가에 섞여서 느끼든 좋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건 무언가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봤다는 것이고 좋다는 마음을 부정한다는 건 내 삶이 그 가치와 관계 맺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좋다는 마음은 나를 괴롭게 한다고 해서 도망치거나 멈춰야 할 것이 아니라 내 삶에 깊이 들여 관찰해볼 만한 것이 아닌가?
심리학적으로도 모순을 안에 담고 있다는 건 성숙의 척도이지 빨리 척결해야 하는 신호가 아니라고 한다.
좋다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강한 의심과 혼란을 가져봤다면 그건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다는 말이 쉽니?
내가 좋아하는데 잘하기까지 하는 건 당연하게도 좋다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있을리가 없다.
그런데 왜 좋은지 모르고 좋아하는 것은 말하기 부족하고, 좋은데 내가 잘할 자신도 없고 가질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좋다고 말하기에 두렵다는 감정이 든다. 좋다고 했는데 오래 못 좋아할까봐 좋은 마음을 그저 지켜보기도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이 정리되고 말끔한 상태로만 꺼내져야만 하는 것인가?
누군가가 '좋다'라고 친구에게 혹은 스스로 말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근데 재밌는 건 그렇게 말하고나면 드는 감정은 '큰일났다 이제부터 진짜 좋아지겠네'일 때가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유튜브의 사랑이 시작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 때부터는 커지기만 한다는 댓글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좋아하는 마음이 갑자기 생기는 건 분명 아닐거다.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마음, 감정, 생각들이 좋다는 말 하나로 모두 '좋다'라는 방향으로 정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거 보면 사랑말고 짝사랑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사랑을 암살처럼 한다.
흐리게 좋아하는 것이 선명해지려면,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 내 것이 되려면 결국 꺼내야 한다.
모든 게 선명해야만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갑자기 선명하게 좋아지는 게 더 신기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아낀다. 좋아하기로 하고 좋아하는 대상을 그 자체로도 느끼고 아끼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과 말을 아끼는데 사용한다.
누군가는 섣부르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안 좋은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아마 그 이유는 이 정도 될 것 같다.
- 좋다고 말했는데 거절당하면 어떡해?
- 막상 좋다 해서 알아갔는데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해?
-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도 하고 시간도 들였는데 잘 안되면 어떡해?
일단 이 모든 고민에 공감한다. 이런 고민도 가치가 있다. 다만 이 고민도 결국은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두려운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사실 좋아해서 노력도 하고 시간도 들이고 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이후에 나한테 더 좋은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의 가치를 잘 알아볼 수 있는 경험이 된다. 더 안 좋아졌다면 그것이 더 안 좋아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 나의 진짜 욕망과 결핍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경험이 된다. 좋다고 말했는데 거절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나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다가가보면 된다.
그리고 이미 쌓인 마음들을 '좋다'가 아닌 다른 것으로 정리한다고 내 삶에 도움이 되나
일단 '좋다'라고 말하면 안되나
이왕이면 좋아해버리는 편이 늘 삶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좋다는 마음과 말이 데려가주는 세계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게 생긴다는 건 그걸 통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 같다.
예를 들면 나는 창가자리를 좋아하는데 창가자리를 통해 더 쉽게 만나는 세계들이 있다.
창가자리는 내게 동네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보게 해주고, 또 책을 편안히 맛있게 볼 자리를 마련해주고. 계절과 햇빛과 바람을 느끼게 해주고. 건물 안에 있는 것 뿐 아니라 바깥에 있는 구조물들을 자세히 볼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해 준다.
처음엔 이유도 모르고 창가자리에 앉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어딜 가도 앉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 자리가 왜 좋은지 알게 되다가, 기억해두고 싶어서 기록해두고 그렇게 창가자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니 창가자리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알아봤 것도 아니고 느꼈던 것도 아니다.
어떤 창가자리에선 이전의 창가자리들과 다른 것을 알게 되면서 이런 창가자리도 존재하는구나 알아가면서, 또 누군가는 같은 창가자리도 나와 다른 점 때문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같은 자리라도 다른 계절에 오면 다른 기분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알아갈수록 무궁무진한 세계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좋은 것을 좋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것!
생각해보면 처음엔 내가 옆에 두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내가 옆에 두기로 결정한 것들이 나의 세계를 지탱해줬다. 그런 것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내가 있는 곳이 좋은 곳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고 오래 좋아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들이 많았지만 그런 두려움들이 무색하게 좋은 건 좋다고 말하고 나면 좋아질 일 밖에 없었다.
좋다는 마음과 말은 섬처럼 존재하고 있는 내 세계를 정말 좋은 것으로 연결시켜 준다.
사람은 말하는대로 된다는데 난 이 말이 담고 있는 통찰이 있다고 본다. 사람의 말은 자기를 개방하는 창구고 그 창구로 내 밖에 있는 것들이 나에게 들어오거나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나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리 고통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표현을 쓰는 거 아닐까?
이제는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기 보다는 섬처럼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가 지켜지길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이 단절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그럤다. 누군가 나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하거나 불편한 자리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어쩌면 섬처럼 내 세계를 탐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발견되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방식으로 발견되고 또 연결되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열쇠가 좋아하는 걸 많이 말하고 다니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발견되면 연결되는 것 역시, 나를 알아보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찾길 원하고 있는 것도 나를 열심히 찾고 있다는 그 말처럼 말이다.
근데요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이거였다.
그런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건 혼자 힘으로 생길 수 없다. 나는 주관이 뚜렷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그럼에도 10대, 그리고 20대 초반까지도 '나 자신이 되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선생님, 동일 집단의 친구가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20살이 된다 해서 갑자기 나 자신을 알아갈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이런 것은 정규교육 커리큘럼처럼 뭐를 따른다고 알아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나의 10대와 20대에는 사회에 '자존감'이라는 것이 화두처럼 떠올랐다.
재밌는 건 이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는 좋은 화두를 던져주었지만 자존감이 뭔지도, 존중해주는 방법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싶다. 그러다보니 자존감이 높으면 높은대로 이해가 안되는 지점이 있었고 낮으면 낮은대로 죄책감이나 자책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개념 정립이나 학문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진입로로 쓰이는 게 아니라 타인이나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쉽게 판단하는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높으면 높다고 느끼는대로 낮으면 낮다고 느끼는대로 파괴적인 지점이 생겼다.
이게 나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 같다. 나는 이게 '좋다'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자존감에 대한 태도가 좋다라는 태도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자존감이 좋은 것을 올곧게 좋아하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의 자아상을 존중하지 못하고 그것이 단단해질 겨를 없이 이리 저리 정신 없이 흩어 놓는데 그 밑에 박힌 것들을 어떻게 파랴?
땅도 단단하게 굳은 후에 파야 묻힌 것들을 잘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정신 없이 흩어진 게 개인의 탓은 아니라고 본다.
나를 알라는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줘야 한다는데 정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 스스로만 좋아하면 오래 흔들리지 않고 좋아할 수 있나?
그리고 남의 욕망에 기대어 살기 좋은 이 시대에 처음부터 자존감이니 좋아하는 마음이니 하는 게 개인만의 힘으로 단단해질 수 있는 건가?
'자존감 높은 사람이 좋다' 정도의 디렉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건가?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조금이라도 미달된 감정이나 모습은 그냥 부정하며 없는 것처럼 살아가거나 자책감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닌가?
근데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면 사실 그런 내가 인정 받는 경험이 한 번쯤 있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여도 내가 좋아하는 나와 '이건 좀… '하는 내가 있을텐데 좋아하는 내가 더 많이 나오고 그런 모습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와 환경도 있어여 할 거고, 또 좋아할만한 것들이 많아서 더 좋은 내가 될 수도 있는 자원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 이유는 이거 아닐까?
좋은 것들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해서
그리고 그렇게 개별적으로 좋은 것들을 좋은 거라고 인정할 기회가 없어서,
무조건적으로 미치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시간이 할 시간이 없어서
모르겠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지 못한거다.
이것도 좋을 수가 있다는 걸. 이렇게도 이런 마음과 관계로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이 정도로만 일단은 좋아해도 된다는 걸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좋아할 만한 것을 알아갑시다
생각해보면 나도 쉬운 마음은 좋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쩐지 어렵게 찾아내고, 복잡하고 대단한 걸 알아낸 것 같고. 그럴 때 성취감과 같이 쥐어지는 좋은 것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역사학과 교육학을 좋아해라던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좋아해, 문자사를 좋아해 같은 걸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창가자리를 좋아해, 회에다가는 소주 마시는 걸 좋아해, 맥주 패키지 디자인 보는 거 좋아해, 원두노트를 세심하게 쓴 카페를 좋아해 이런 것이 '무엇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의 답이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가 내가 선호하는 대답이라는 것이 아니라 전자도 후자도 이제는 내 선택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불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불 옆에 있어봐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불이 몸을 녹여주기도 하지만 붙을 수 있는 거구나, 불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불로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누군가에게는 한 순간에 집을 잃는 재앙을 누군가에게는 평생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축복을 줄 수도 있는거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게 알고 나서야 불과의 거리도 조절하고 불을 다루면서 내 삶에서 불은 어떤 것일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사실 맥주를 너무 좋아해서 맥주를 공부하다가 맥주의 역사를 깊이 공부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맥주 패키지 디자인을 보다가 이 문자는 중국 한 시대의 글씨체인데 왜 이걸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에서 나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찾아보자
좋은 삶은 별거 없는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면 된다.
계속해서 말했지만 나는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걸 가지고 써?'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걸 가지고 쓸거다.
좋다는 것의 본질이 가치를 알아보는 거라고 할 때 좋은 것이 더 좋아지고, 더 좋아지고 이런 것은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치 올리는 건 별거 없는 것 같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걸 꺼내서 꾸준히 말하는 거, 세상에 좋은 거 멋진 거는 많은데 그런 거 말고 내가 좋은 거에 집중하는 거
하나의 언어에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데 좋다고 말하기로 했으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곧 내 삶이 좋아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될 것 같다. 사실 이 글은 그 프롤로그이자 앞으로는 '좋다'고는 쉽게 하기로 합의한거다라고 약속하는 글이다.
여기까지 봤다면 그런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좋다는 대상에 하나씩 집중해보려고 한다. 좋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게 된 역사와 좋아하게 된 기억, 그런 것들이다.
좋아하는 걸 나만의 언어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길 바라며
글의 초입에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 있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야기 했다.
잃기도, 거절당하기도, 비웃음 당하고도 싶지 않은 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일거다.
나는 그 감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리 글로 메시지를 발신하기는 해도 강요하지는 않을거다.
그럼에도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면, 그래서 마음이 동했다면, 그 마음만은 오래 함께 기억해줄 수 있게 나눠줬으면 좋겠다.
"쟤는 저거 좋아해"
세상엔 생각보다 못된 사람도 있어서 근데 잘 못하더라 그래서 좋아보이더라,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할 자격이 되냐 안되냐 판단이 따라올 수도 있다.
근데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뭐여도 누군가 나를 말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일단 따라 붙는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 말해야지만 좋아하는 것이 오래 내 옆에 남는다.
'저거'와 '좋아해'라는 것이 내 삶에 남아 있다는 거, 남을 거라는 거에 집중해보자
잠깐씩의 비참한 평가와 좋아하는 것 앞에서 뚝딱대는 순간들은 추한 것도 아니고 영원할 것 같지만 금방 나를 떠난다. 아마 평가보다는 함께하자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내가 내 것이라고 하기로 결정만 한다면 늘 오래 살아남는 것은 좋은 것들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내 장점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늘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좋아할만한 이유 하나 기가 막히게 찾는거요"
그렇게 좋아할만한 이유 하나 잘 찾아서 좋아하기 시작하는 게 내 장점인데도
그것을 좋아하기로 하고 내 인생에 들이면 좋아함 1시기, 2시기, 3시기처럼 역사구분이리도 만들듯이 내가 처음 본 외에도 좋아할만한 이유가 생겨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게 되는 것도 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녀서 함께 얘기할 사람들이 생기면 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거 안 쓴지 오래됐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걸 발견하고 기록하는 걸 멈춘 것은 아니다.
저런 메모를 썼던 순간들 덕분에 좋아하는 것들을 더 세세하게 발견해서 기록해두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알게 됐고, 저렇게 기록하는 게 지금의 내 스타일이 아닐 뿐이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걸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즘도 도시락 싸먹는 거 좋고, 주말에 늦잠 자는 거 좋고, 빨래할 때 기분 따라 섬유유연제 고르는 거 좋고, 볕 좋은 곳에서 책 보는 거, 자기만의 열심히가 있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이야기하는 거 좋다.
사실 요즘이라기엔 꽤 오래 좋아했던 것들이라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마음이 편하다.
최근에 느낀건데 나는 말하는 걸 좋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있을 때, 어떤 주제로, 어떻게 판이 깔렸을 때 말하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거고 그 ‘어떤’을 찾아가는 게 삶이고 곧 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한 번의 경험만으로는 안되고 다층적으로 쌓아가야 그걸 곧 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왕이면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좋아하기로 했다.
여전히 어렵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말로 잘 표현하기로 했다.
남들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많이 기억하기로 했다.
경험을 쌓을 거라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좋아하는 것과 경험을 쌓아가기로 했다.
그냥 내가 그러기로 했다.
그게 현재의 이름 조은으로 개명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