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0 나미비아. 기대한 결론은 아니지만
Bg. feel alright - 짙은
엄마, 나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더 많은 걸 보고 싶었고, 느껴보고 싶었어요. 다들 여행으로 많을 걸 얻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게 추억이든 자랑이든 깨달음이든 말이에요.
엄마 사실은요. 엄마가 야무진 딸이라고 나를 불러줬지만. 제대로 아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이었어요. 벌써 3학년인데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어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도 몰랐어요. 나는 어떻다 할 경험도 없어서 너무 얇기만 한 내 삶 같아서 그냥 좀 넓혀보고 싶었어요. 진로, 관계, 사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나는 뭐부터 채워야 하는지 해결해야 하는지 몰라서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으로 도망쳤어요.
도망가서 다 해보고 싶었어요. 이것저것 경험하면 나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돼보고, 새로운 상황에 처해보고 싶었어요. 매일매일 새로운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 기대감으로 이 여행을 나섰어요. 구체적으로 내가 뭘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이 나를 여행하게 했어요. 나에게 좋은 거름이 돼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 나는 그래서 인도로 떠났어요. 인도에는 수행자도 많다고 하니 가면 내 고민이 해결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 한 권 챙겨 인도로 갔어요. 인도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하나의 진리도 없고 절대적인 가치란 없나 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해도 그렇게 잘 흘러가는 게 그들 삶의 방식이에요. 모두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조금은 알 거 같아요.
그리고 나 또 아프리카로 향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토지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았어요. 케냐라는 나라에서 잠시 봉사도 했어요. 나는 참 별거 없는 사람인데 나의 존재를 나보다 고맙게 여겨줘서 눈물 나는 순간들이었어요. 가난한 사람은 정말 많고 부족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참 많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어요.
엄마, 여행은 정말 멋져요.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을, 모래바람을 머금은 사막을, 비를 내리게 하는 폭포를 만날 수 있거든요.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들, 모두 달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죠. 나는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상상으론 다 채울 수 없던 장면들을 직접 완성시키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곳들을 지도에 찍어가며 세상에 흔적을 남겼어요.
근데요 엄마.
나는 매일 다른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하루를 맞이하면서 여전히 수십 번씩 방황하고 있어요.
여전히 매번 헷갈리고 잘 모르겠고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불안정해요. 떠나기 전 내가 집과 학교를 오가며, 또 사람들 속에서 겪었던 아주 사소하고 현실적인 일들을 그대로 또 마주하고 있어요. 여행을 떠나 현실을 벗어나면 많은 게 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내 가까이 붙어서 나를 잡고 늘어지는 것들은 그 전과 같은 창피할 만큼 지독할 만큼 뻔하고 시시한 것들이에요. 해야 할 것을 미루다가 하는 후회와 반성. 무지가 가져오는 잘못된 선택.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에서 오는 갈등. 그런 것들 말이에요. 나는 이런 것들을 하려고 떠난 게 아닌데 말이죠.
나는 내가 여행을 떠나면 매일 밤 내 방 침대에 누워 상상했던 것처럼, 자유롭고 멋지고 따뜻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알게 되고 나에 대해 많이 깨달을 줄 알았어요. 좀 더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근데 여전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무얼 선택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돼야 하는지. 사랑은 뭔지. 행복은 뭔지. 해답을 얻은 건 하나도 없어요.
대신 여기서 깨달은 것들은요.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할 거 같아. 그 말투는 쓰는 게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역시 귀찮더라도 미리 정리해 놓는 게 나았어. 이런 것들뿐이에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꼭 필요하고 자연스레 하는 생각들이죠.
엄마 돌아보니, 저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됐었어요. 인도, 유럽, 이집트, 아프리카를 떠돌았던 저의 지난 육 개월은 빛났던 순간들이었지만요, 제 심오했던 고민들은 인도에 간다고 해서 아프리카에 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어요. 나를 변화시키는 건 저 고민들에 대한 정답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저 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살아가며 맞이하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과 같은 그런 평범한 하루들이었어요. 그 하루 속에서 겪는 일상적인 고민과 다짐과 반성이겠지요.
나는 결국 한국에서 하던 일들을 여행에서도 그대로 하고 있었어요. 왜냐면 그것들이 제 삶을 이루는 가장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들이니까요. 그니까 전 애써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됐던 거예요.
하지만요 엄마.
떠나지 않았다면 저는 이걸 끝끝내 몰랐을 거예요. 여행을 결심했던 1년 전. 그때는 쳇바퀴 도는 하루에 갇힌 나를 버릴 수 있어야만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현실의 그곳을 벗어나야만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여행으로 도망쳤던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여행을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동경하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저는 여행을 통해서 뭔가를 얻고 충전하겠지만 이제 그곳들은 더 이상 저의 도피처는 되지 않을 거 같아요.
이렇게 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요. 나 여행 가서 이런 걸 깨달았어!라고 내세울 만한 거 없고 그저 얻을 거라곤 잔재주 몇 가지와 그동안 몰랐던 상식들 뿐이에요. 한껏 달라진 나를 기대했지만 저는 여전히 게으르고 실수투성이예요. 그래도 한국 가면 이제 좀 더 저의 삶을 사랑하고 믿어줄 수 있을 거 같아요. 꼭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요.
저 이렇게 여행을 마무리해요.
내가 생각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운 결말이에요.
한국에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