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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춤 Oct 22. 2023

09 엄마, 나 돌아가요

D+170 나미비아. 기대한 결론은 아니지만

Bg. feel alright - 짙은


엄마, 나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많은  보고 싶었고, 느껴보고 싶었어요. 다들 여행으로 많을  얻을  있다고 했어요. 그게 추억이든 자랑이든 깨달음이든 말이에요.


엄마 사실은요. 엄마가 야무진 딸이라고 나를 불러줬지만. 제대로 아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이었어요. 벌써 3학년인데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어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도 몰랐어요. 나는 어떻다 할 경험도 없어서 너무 얇기만 한 내 삶 같아서 그냥 좀 넓혀보고 싶었어요. 진로, 관계, 사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나는 뭐부터 채워야 하는지 해결해야 하는지 몰라서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으로 도망쳤어요.


도망가서 다 해보고 싶었어요. 이것저것 경험하면 나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돼보고, 새로운 상황에 처해보고 싶었어요. 매일매일 새로운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 기대감으로 이 여행을 나섰어요. 구체적으로 내가 뭘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이 나를 여행하게 했어요. 나에게 좋은 거름이 돼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천공항으로 가던 날. 거센비가 내려 무서웠다


엄마, 나는 그래서 인도로 떠났어요. 인도에는 수행자도 많다고 하니 가면 내 고민이 해결될 거 같았어요. 그래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 한 권 챙겨 인도로 갔어요. 인도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하나의 진리도 없고 절대적인 가치란 없나 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해도 그렇게 잘 흘러가는 게 그들 삶의 방식이에요. 모두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조금은 알 거 같아요.


그리고 나 또 아프리카로 향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토지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았어요. 케냐라는 나라에서 잠시 봉사도 했어요. 나는 참 별거 없는 사람인데 나의 존재를 나보다 고맙게 여겨줘서 눈물 나는 순간들이었어요. 가난한 사람은 정말 많고 부족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참 많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어요.


인도 함피
인도 타지마할
인도 갠지스강


엄마, 여행은 정말 멋져요.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을, 모래바람을 머금은 사막을, 비를 내리게 하는 폭포를 만날 수 있거든요.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들, 모두 달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죠. 나는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상상으론 다 채울 수 없던 장면들을 직접 완성시키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곳들을 지도에 찍어가며 세상에 흔적을 남겼어요.


근데요 엄마.

나는 매일 다른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하루를 맞이하면서 여전히 수십 번씩 방황하고 있어요.

여전히 매번 헷갈리고  모르겠고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불안정해요. 떠나기  내가 집과 학교를 오가며,  사람들 속에서 겪었던 아주 사소하고 현실적인 일들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어요. 여행을 떠나 현실을 벗어나면 많은  달라질  알았는데 여전히  가까이 붙어서 나를 잡고 늘어지는 것들은  전과 같은 창피할 만큼 지독할 만큼 뻔하고 시시한 것들이에요. 해야  것을 미루다가 하는 후회와 반성. 무지가 가져오는 잘못된 선택.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에서 오는 갈등. 그런 것들 말이에요. 나는 이런 것들을 하려고 떠난  아닌데 말이죠.


나는 내가 여행을 떠나면 매일 밤 내 방 침대에 누워 상상했던 것처럼, 자유롭고 멋지고 따뜻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알게 되고 나에 대해 많이 깨달을 줄 알았어요. 좀 더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근데 여전히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무얼 선택해야 하는지.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돼야 하는지. 사랑은 뭔지. 행복은 뭔지. 해답을 얻은 건 하나도 없어요.

르부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함피의 밤하늘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에 위치한 빅토리아 폭포


대신 여기서 깨달은 것들은요.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할 거 같아. 그 말투는 쓰는 게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역시 귀찮더라도 미리 정리해 놓는 게 나았어. 이런 것들뿐이에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꼭 필요하고 자연스레 하는 생각들이죠.


엄마 돌아보니, 저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됐었어요. 인도, 유럽, 이집트, 아프리카를 떠돌았던 저의 지난  개월은 빛났던 순간들이었지만요,  심오했던 고민들은 인도에 간다고 해서 아프리카에 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어요. 나를 변화시키는   고민들에 대한 정답에서 나오는  아니었어요. 그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살아가며 맞이하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과 같은 그런 평범한 하루들이었어요.  하루 속에서 겪는 일상적인 고민과 다짐과 반성이겠지요.


나는 결국 한국에서 하던 일들을 여행에서도 그대로 하고 있었어요. 왜냐면 그것들이 제 삶을 이루는 가장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들이니까요. 그니까 전 애써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됐던 거예요.


하지만요 엄마.

떠나지 않았다면 저는 이걸 끝끝내 몰랐을 거예요. 여행을 결심했던 1년 전. 그때는 쳇바퀴 도는 하루에 갇힌 나를 버릴 수 있어야만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현실의 그곳을 벗어나야만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여행으로 도망쳤던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여행을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동경하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저는 여행을 통해서 뭔가를 얻고 충전하겠지만 이제 그곳들은 더 이상 저의 도피처는 되지 않을 거 같아요.


이렇게 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요. 나 여행 가서 이런 걸 깨달았어!라고 내세울 만한 거 없고 그저 얻을 거라곤 잔재주 몇 가지와 그동안 몰랐던 상식들 뿐이에요. 한껏 달라진 나를 기대했지만 저는 여전히 게으르고 실수투성이예요. 그래도 한국 가면 이제 좀 더 저의 삶을 사랑하고 믿어줄 수 있을 거 같아요. 꼭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요.


저 이렇게 여행을 마무리해요.

내가 생각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운 결말이에요.

한국에서 봐요.



나미비아 국립공원
대륙의 최남단이라 불리는 남아공의 희망봉
최남단 희망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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