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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Oct 27. 2019

앙코르 제국의 수도, 시엠립

화려했던 앙코르 제국

                   앙코르 유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시엠립일까?

   

  앙코르(Angkor)는 ‘수도’‘도시’를 뜻한다. 시엠립 외곽에는 200개가 넘는 사원이 400 km²에 걸쳐 퍼져있다. 앙코르 시대가 시작된 802년부터 태국 아유타야 왕국에 밀려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긴 1431년까지를 시엠립의 앙코르 제국 시대라고 말한다. 이 기간 동안 28명의 왕이 있었다. 앙코르 시대를 연 자야바르만 2세(802~803), 앙코르왓을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 앙코르톰을 건설하고 가장 강성한 앙코르 제국을 만들었던 자야바르만 7세(1181~1215) 등.

  시엠립은 돈레삽과 가깝고 시엠립강을 끼고 있다. 그리고 크메르족이 성지로 여기는 프놈쿨렌산이 있다. 앙코르 시대를 연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시엠립에 세우고 시엠립의 앙코르 제국은 그 후 6백여 년간 이어진다(이전 첸라 시대의 수도는 껌뽕톰주 썸보쁘레이쿡. 시엠립에서 150km 떨어져 있다). 힌두교는 앙코르 시대에도 계속된다. 대부분의 앙코르 사원에는 힌두교의 3대 신인 쉬바, 브라흐마, 비쉬누를 비롯 많은 신이 등장한다. 그러다 대승불교를 믿었던 수리야바르만 1세(1002~1050)가 즉위하며 불교를 받아들인다. 불교가 크게 융성한 것은 자야바르만 7세가 즉위하면서다. 철저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앙코르톰 중앙에 불교 사원인 바이욘 사원을 세우고 그 안에 54개의 탑과 200개가 넘는 관음보살상을 만든다. 자신을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라고 생각하며 많은 불교 사원을 짓고 입구 사면에는 어김없이 관음보살상을 세웠다.

  그러나 뒤이어 즉위한 왕부터는 다시 힌두신을 신봉되며 불교 사원이 파괴된다. 이때부터 사원은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다. 앙코르왓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 시기에 지어진 힌두교 사원인데 그 안에 힌두신상과 불상이 같이 공존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앙코르 유적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크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새롭게 왕이 바뀔 때마다 왕은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을 신과 동일한 존재로 알리기 위해 사원을 지었다. 사원 인근에 더 크고 화려한 사원을 짓기도 하고 기존 사원을 증개축하기도 했다. 앙코르왓 회랑의 조각은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에 새겨진 것도 있으며, 왕궁 안의 피미엔나까스는 초기 건설된 것을 후대 왕이 개축한 것이다. 앙코르톰 또한 야소바르만 1세(889~910) 재위 시절에 앙코르왓 맞은 편의 프놈 바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를 자야바르만 7세가 새로운 계획도시로 확장, 건설한 것이다. 앙코르 초기에는 왕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하는데 이것이 앙코르 유적이 광범위하게 펼쳐진 원인이기도 하다.

  앙코르 유적은 오랫동안 밀림에 묻혀 있었다. 앙코르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캄보디아가 프랑스보호국(1863~1953)이 되면서부터다. 프랑스 탐험가와 수도사들이 그전에 앙코르 유적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생물학자였던 앙리 무오가 4차례 탐험했던 기록이 그의 사후 한 잡지에 실리면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앙코르 유적을 감상하기 전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앙코르 유적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린다. 앙코르 유적은 넓게 퍼져있고 유적의 규모도 상당히 크기에 방문할 때는 며칠간의 일정으로, 어디를 먼저 가 볼 것인가 미리 계획을 짜는 것이 좋다. 티켓은 1일 37$, 3일 62$, 7일 72$이며 티켓 판매 시간은 04:30~17:00이다.

시엠립 앙코르 유적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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