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할 일이 생겨서 딸과 함께 케이크를 사러 갔다. 기분만 내려고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살 계획이었는데, 아이는 커다란 케이크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보고 있나 봤더니, 아이가 바라보는 곳에는 파란색으로 꾸며진 공룡 케이크와 분홍색으로 꾸며진 공주 케이크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결정했을 텐데, 계속 고민하고 있는 딸이 낯설었다. 한참 고민하던 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게 말했다.
여자아이니까 공주 케이크 골라야 해요?
나는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걸 고르면 되는 거야."라고 하면서 사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소매로 눈물을 닦은 아이는, 공룡 케이크를 골랐다. 계산을 하러 가자, 판매원이 말했다.
"이건 남아용이고, 공주 케이크는 옆에 있어요."
옷도 그렇고, 놀잇감도 그렇고, 판매원이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내 돈 내고 내가 사는 건데, 제발 그냥 좀 좋아하는 걸로 사자. 하...
판매원의 말을 들은 아이는 다시 고민에 빠졌고, 나는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원하는 공룡 케이크를 고른 아이. 판매원은 "여자아이가 특이하네요."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게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얼마나 좋아하던지 "엄마 최고!"를 계속 외쳤고, 그 기분 그대로 축하도 멋지게 했다. 케이크에 있던 공룡 장난감도 잘 가지고 놀았다. 아이들이 특이한 걸까, 아이들을 특이하게 만드는 걸까.
자기 전에 아이에게 들어보니, 어린이집에서 색칠놀이를 하던 중에 어떤 언니가 분홍색 색연필을 주면서, "여자니까 여자색 써야지."라고 했고, 또 한 친구는 "너는 분홍색 치마 안 입으니까, 여자가 아니야."라고 했단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혼란스러웠나 보다. 그렇다고 아이가 분홍색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건 아니다. 다만, 분홍색'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거다. 세상에 예쁜 색이 너무 많은데, 여자아이들끼리 서로 분홍색을 쓰겠다며 싸우게 되는 상황이 싫다. 확실한 건, 분홍색은 여자색이 아니고,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이 여자아이의 본능도 아니라는 것이다.
네다섯 살 무렵, 여자아이에게는 핑크병이 온다고 한다.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고 보는데,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나중에 생기더라도 짧게 왔다가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참 이야기 나눈 후, 아이가 내게 말했다.
왕자가 되고 싶어.
응? 갑자기? 이유를 물어보니 왕자가 말을 타기 때문이랜다. 이래서 공주 동화책은 읽어주지도 보여주지도 않았건만, 어린이집에서 알게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씁쓸하긴 하다. 말은 왕자만 탈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탈 수 있다고 이야기해줬다. 엄마도 탈 수 있고, 아빠도 탈 수 있다고.
왕자 돼서 말 타고 엄마 구해주려고 했어요.
자기가 본 이야기에서는 왕자만 말을 탔다며, 공주는 긴치마를 입기 때문에 말을 탈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아이. 여자도 왕자가 되면 말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모든 여자아이가 분홍 공주를 꿈꾸는 건 아니다. 분홍색과 공주 놀잇감으로 여자아이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건, 그런 것을 만들고 판매하고 구매하는 어른이다.
저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가 잠들어 버려서 엄마를 구해주고 싶은 이유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기특하다가도, 내가 피곤해 보여서 그런 것 같아 미안했다. 잠든 아이를 쓰다듬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엄마는 너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너의 세상은 더 좋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