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공주와 핑크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안 좋아하는 척하는 걸까?'라는 생각. 나도 모르게 '내 신념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아이도 좋아하는 것처럼 아이에겐 엄마의 영향이 크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와 공주 그림으로 무장(?)한 여자 아이들을 볼 때마다 혼란스럽다. 아이의 취향이 그렇다면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 속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초등학생이 되면 핑크는 '유치한 여자 유아용 색'이라고 취급한다는데, 대체 누가 핑크를 여자 유아용으로 정한 건지, 핑크는 참 억울하겠다. 여러 색 중에 분홍만 핑크로 불리는 것도 신기한 현상. 우리말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핑크로 칭하려 한다.
어느 날, 공룡이 그려진 운동화(자기가 직접 고른 것)를 즐겨 신던 아이가, 너무 딱 맞아서 안 신던 핫핑크 털부츠를 신겠다고 했다. 물려주려고 세탁해놨기도 하고, 불편할 텐데 갑자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여자 친구들은 다 핑크색 신고 와요.
어린이집 신발장에 놓여 있는 신발들이 생각났다. 정말 그랬다. 아이에게 신발은 걷고 뛸 때 편해야 하는 거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친구들마다 좋아하는 게 다 다르다고 말하면, 순간 설득은 된다. 하지만, 다른 날 같은 일이 반복된다. 다음 신발은 핑크로 사야 하는 걸까. 그나마 핫핑크는 괜찮지만, 흐리멍덩한 파스텔톤 핑크에 반짝이 가득한 신발은 정말 싫은데. ㅠㅠ
엄마는 '핑크는 여자색이 아니다'라고 하면서'세상에 예쁜 색이 많다'라고 하는데, 여자 친구들은 온통 핑크니 아이도 꽤나 혼란스러울 것 같다. 최근엔 남자 친구가 핑크를 골랐다고 이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빠한테 핑크 티셔츠를 입히면 좀 나을까 싶지만, 남편에게 핑크는 너무 안 어울린다는 게 함정.
얼마 전, 시부모님이 공주 드레스를 사 주시겠다고 했다. 그게 시작일까 봐 거절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어린 시절에 드레스나 발레복 입었을 때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서 더 그렇다. 하지만 드레스 입은 친구를 봤을 때 아이가입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서 나도 편한 원피스를 찾고 있던 상태라 알겠다고 했다. 보내주신 사진을 보면서 아이와 함께 골랐다. 선별해서 보여줄까 했지만, 그냥 아이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고, 아이는 알록달록한 게 좋다며다행히 올핑크를 고르진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공주옷(생각보다 꽤 비싸서 깜놀). 아이는 입자마자 빙그르르 돌면서 좋아했다. 시부모님과 영상 통화하면서, 공주라며 옷을 벗지 않겠다고 하는 아이, 흐뭇해하시는 어른들. 모두 다 행복한데 나만 마음이 무거웠다. 통화 종료 후, 그렇게 좋아하니 좀 놀다가 잘 때 갈아입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벗겨달랜다. 벗기 싫다더니 웬일인가 싶었는데,
놀기 불편해. 할머니 집에 갈 때 입을래.
아이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너무 깊게 고민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불편하다고 말도 못 했는데, 아이는 또래 문화를 접하고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아이를 믿으면서 아이의 결정을 응원하면 되는 걸, 내 기준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미리 걱정하나 보다. 나보다 낫다. 그나저나 사준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서 호응에 응해주다니, 사회생활 잘하겠군. 이것도 나보다 낫다.
주말에 남편과 있을 때 입혀서 영상 통화하려 했는데 아까(아직 어제 내일의 개념을 잘 모름) 한 번 입었다며 안 입겠단다. 한 번 입고 안 입겠다니 아동 모델이야 뭐야. 순간, 택 안 뗐는데 환불하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나중에 또 찾을 수 있으니 그냥 두기로 했다.
아무튼, 첫 손주라서 뭐든지 사주고 뭐든지 보여주시려는(유튜브 ㅠㅠ) 시부모님. 너무 감사한 한편, 이번 경험을 토대로 핑크 공주 상품들을 계속 사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핑크 공주 장난감을 한번 사셨다가 아이가 가지고 놀지 않자 아이가 좋아하는 자동차나 공룡 장난감을 사주셨는데, 역시 포기하지 않으셨던 거다.
드레스가 많아지면 그것에 익숙해지고 어린이집에 입고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날도 있을 텐데, 어린이집 공지에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입혀주세요."라는 내용이 항상 있는 것처럼, 공주옷 입고 가면 선생님들도 힘들다. 밥 먹고 화장실도 가야 하는데 여러 명을 돌보는 선생님 입장에선 정말 아니지. 뭐 묻힐까 봐 활동하기도 어렵고, 어디에 걸릴까 봐 뛰기도 힘들고. 활동과 안전에 모두 적합하지 않다.
시부모님이 기분 상하지 않게 잘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럴 땐 남편에게 넘기는 게 가장 좋다. 당장은 그렇고 다음에 또 사주신다고 하면 기회를 엿봐서 잘 말해달라고 해야겠다.
에피 1)
딸을 임신한 지인이 딸 공간이라며 올린 사진을 봤다. 온통 핑크. 평소 핑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어쩔 수 없나 보다. 본인이 산 것도 있겠지만 선물 들어온 게 거의 핑크일 테니, 핑크 아닌 걸로 뭔가 하나 선물해줘야겠다.
에피 2)
아들을 키우던 지인이 딸을 낳았다. 아들이 딸 장난감(소꿉놀이, 요리놀이 등)을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정작 딸은 오빠 장난감(자동차, 공룡 등)을 좋아한다며, 딸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던 자신의 로망이 깨진 것 같아서 속상하다고도 했다. 물론, 동생에게 샘내는 오빠의 행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여동생 덕에 요리놀이 등의 장난감은 거의 처음 접해본 거니, 얼마나 신기하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남아 여아 구분 없이 다양한 장난감을 경험하게 해주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