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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희망

by 윤한솔

이 동네에서 천을 따라 걸으면 한강지구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 이후로는 줄곧 걸어서 한강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차피 다시 돌아와야 하는 산책이란 행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한테는

머나먼 일, 끝내 해보지 못하고 이사가며 아쉬워나 할 일이었다.

그렇게 이사 온 지 3년이 넘은 어느날,

갑자기 꽂혀서 씻지도 않은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기 편한 운동화를 골라신고 밖으로 나갔다.

당시는 여름의 초입이었고 기온은 30도를 웃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려 두개의 천을 통과할 장대한 계획이었던지라

시작점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러닝앱도 설치했지만,

그사이 그냥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하는 고민을 수차례 했다.

고민의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버스는 내 앞에 와서 섰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가보기로 했다.

나가서 우연히 마주치는 우연은 곧 인연이라고 생각하니까.

하고싶었던 일은 기어이 해보고 싶으니까.

시작점으로 삼은 곳에서 출발하여 한강으로 향하면서

뜨겁고 습해서 얼굴은 검붉어지고 이러다 더위 먹고 앓아 눕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애초의 목표는 산책이었는데 점점 인내를 테스트 하는 훈련이 되어만 갔고

마음 속에는 평화가 아니라 괜한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맞아?

오후 세시 경, 더위와 내 몸의 열이 최고조가 되었을 때

우연히 눈에 든 카페에 들어가 잠시 땀을 식히고

다시 당차게 출발했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때 쯤,

그러니까 내가 지도에서만 봤던 천의 하류쯤이 되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고

한강이 보일랑 말랑 할때는 입가에 미소가 마구 번졌다.

마침내, 도착.

한강을 보는 것 그 자체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는 것.

생각만 하던 일을 해냈다는 것.

기어이 박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고

전에 없던 경험을 했다는 것.

그래 그런 것이 주는 성취감.

...그러나 성취감과는 반대로 몰골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나에겐 다시 돌아가야 할 길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아서 대차게 따릉이를 대여 했지만 실패.

왜냐? 난 자전거를 못탄다. 그냥 한번 해본거다.

도전의식이 매우 고취되어 있던 상태랄까.

아무튼, 집으로 가는 두번째 천을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8km를 걸어왔고 앞으로 8km를 또 가야했다.

어느 세월에 집까지 가나.. 나는 또 어떻게 걷나.. 하는 생각에

조금 걷고 지도를 켜서 현위치를 확인하고

또 조금 걷고 지도를 켜서 현위치를 확인했다.

그러다 그냥 말아버렸다.

다시는 보지말자 해버렸다.

너무 먼 곳을 보면 갈 길이 아직 멀다는 사실에 더 지쳐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냥 걸었다.

음악을 들으며 한걸음 또 한걸음.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러다 지치면 벤치에 잠깐 앉기도 하고

사람도 구경하고 강아지도 구경했다.

뛰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갈때면

그 사람들의 집 향기, 잘 마른 빨래 향기도 같이 스쳐지나갔다.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은 따라 뛰어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저기요-! 빨래 할 때 뭐 쓰세요~~~!?!?"

"아, 세제는 그거 쓰시고.. 섬유유연제는요~~~?!"

다시 걷고 또 걷고. 걸음을 걷고 또 걷고.

지칠대로 지쳐버렸고 발엔 물집까지 잡혔지만

이어폰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 템포에 맞춰

다시 또 숨이 차게 빨리 걸을 수도 있었다.

와. 역시, 인간은 하려면 하는구나.

난생 처음 쉼없이 16km를 걸어서 두개의 천을 가로 질렀고

간신히 집에 와 샤워를 하고 뻗어버렸다.

의식을 차린 다음날에는 일기에다가 러닝앱 화면 캡쳐한 것도 첨부하고

셀프뽕이 차오르는 문장도 잔뜩 적었다.

언제나 뭘 하려고 하던지간에 두려워하고

대비책을 생각하고 얻는 것을 생각하고 잃을 것을 생각하고

요리조리 각을 재보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이었다.

근데 또 한번 발동이 걸리면 생전 안하던 짓을 한다.

바로 이 날처럼 말이다.

행위는 한번이었지만 그날 얻은 성취감 한보따리와 몇몇의 단상은

오래도록 남아 나를 더 나아가게 하는 사람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혀 보는 사람으로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사람은,

익숙한 것보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서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낯선 표지판. 있는 줄도 몰랐던 곳의 초록.

만개한 양귀비. 흔들리는 청보리.

우연히 들어간 어느 카페에서 만난 반갑고도 귀하디 귀한 흡연 구역.

한강에 사는 물고기. 차를 타고 건너던 다리.

어쩌다 나와 같이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는지 모를 사람들.

길가에 제멋대로 피어 있는 작은 들꽃과 주먹보다 커다란 장미.

그 낯선 모든 것들 속에 있는 낯선 나.

늘 그렇듯 집에 누워있었다면 절대 몰랐을 것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하루.

생각한 줄도 몰랐던 생각들은

세포 하나하나에 알알이 맺혀 나를 이룰테지.

희망없이 살았기에 매순간 절망이었던 나날들이 반복되면

다시 박차고 나와야지.

아무 옷이나 꿰어입고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나서야지.

용기내어 낯선 것들 속으로 발을 내디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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