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만 번의 안녕
안녕, 나의 오래된 우울.
너를 마주할 때마다 인사를 건넸다면
아마 만 번도 넘는 안녕을 말했겠지.
때론 이유가 있어서,
또 때론 이유도 없이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아
탓하고 탓하고 탓하다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아버렸지.
서러울 것도, 슬플 것도,
기분 나쁠 것도 참 많은 나는
좀처럼 굳건히 서있을 줄을 몰랐고.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마주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지낸 것으로는 모자란 지
매일 더 나은 것을 갈구하고, 그러나 가질 수는 없고.
머물러서 좋지만 머물러서 나쁜.
나아가는 것 같아 기쁘지만 미미해서 힘이 빠지곤 하는
매일 같으면서도 다른 하루들.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불안해하면서
아무 일 없어도 혼자 망상을 만들어내고
기류를 비틀어 불안을 이끌어 냈다.
마음에 안 드는 지점을 기어이 찾고 끄집어내서 으깨어 즙을 내버렸다.
불안이라 여겨질 수 있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래 이 모든 것은 불안이었어, 엉망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0.001% 오렌지 과즙이 들어간 음료도 오렌지 주스는 오렌지 주스인 것처럼.
산소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뭔가가 섞여 있는 이 공기처럼
내가 쉬는 숨에 기어이 불순한 다른 감정을 섞었다.
그제야 숨쉴 만 하다는 것처럼 여기는 듯이.
그러나 안녕, 나의 오래된 우울.
다가온 우울에게 만 번의 안녕을 건넸다면
다시 네게 만 번의 안녕을 건네며 멀어져야지.
함께하는 시간동안 네 안에서 편안했고 불편했고
행복했고 불행했다.
안전했으나 불안정했고 불안했으나 그것을 평온이라 여겼다.
네가 나의, 전부였다.
고요마저도 소란하게 느껴지는 밤에
홀로 가라앉아 숨 쉬는 방법을 잊던 날을 지나서
이제는 마침내.
엉망진창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도 난 내가 기특하다.
나쁜 생각과 습관을 가지도 살아도
언제 어디서든 거울을 보면 꼭 웃어 보이는 내가 꽤나 사랑스럽다.
내 마음도 살필 줄 모르지만
다른 이의 마음을 살뜰히 살피는 내가 대견하다.
버겁더라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 어김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속으로 우는 날에도 사람들과는 웃으며 보내며
그래 이만하면 됐지 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창문에 덕지덕지 붙여놨던 검정 시트지를 떼어냈다.
채광 좋은 집은 축복이거늘 난 그 해가 싫어서
조금도 들어오지 않게 온통 막아놨었다.
어두운 집이 좋았고 볕이 꼴 보기 싫었다.
밝은 건 마음이든 사람이든 빛이든 다 싫었다.
시트지를 떼기에 앞서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한참 그 앞에 서서 고민을 했다.
뜯을까 말까.
마치 장대한 여정에 발을 들이는 사람처럼 비장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곤, 모두 떼어냈다.
빛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밖을 내다보기로 결심했다.
부는 바람을, 그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나뭇잎을,
때때로 오는 비를, 내리쬐는 햇살을.
그 모든 것들을 마침내, 마침내.
존재가 흐려지던 날들을 지나서
나의 어둠이 흐려지는 날을 맞이하고 있다.
심지어는 오늘 내 하루는 분명 좋고 행복할거라고,
그리고 내일도 행복할거라도 믿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그것들이 이제야 믿긴다.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마음을 무너지게 할 것만 같은 일을 만나면
한 발 물러나서 살펴보게 되었고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아쉽게 된 거라며
그냥 툭툭 털어버릴 줄도 알게 되었다.
내게 나쁜 것들은 의식적으로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좋은 사람까지는 몰라도 어제 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들어와 이불을 덮으며
당차게 하루 끝!을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오늘 하루는 정말 좋았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 고요는 여전히 소란하여도,
그런 밤과 밤을 지내며 살아도,
다시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지더라도,
극복해야 할 것들은 내 키보다 더 높게 자라 있고
마음은 여전히 모나서 여기저기가 삐죽하더라도,
이런 나라도 나는 내가 좋다고.
누가 바꾸자고 해도 나는 절대 바꾸지 않고
내가 나인채로 살아갈 것이라고,
스스로와 반짝이는 약속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