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나은 Sep 21. 2021

한 여중생의 바른생활

모범생이기를 포기하는 과정

  중학교 때 전교에서 상위권을 맴돌았지만 당시 여자 상업 고등학교랑 붙어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질이 그렇게 좋은 편에 속하지 않았다. 때때로 칠이 벗겨진 끼익 거리는 비치색 화장실 문은 위아래 틈새가 있었는 데 쉬는 시간 10분 안에 담배 연기가 뭉게 올라왔다. 중학교 여자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겠냐라는 순수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그들은 정말 폈다. 심지어 도넛 모양도 만들 줄 알았고 코로 연기를 뿜어내면서 용가리라고 칭하면서 키득키득 웃어댔다. 소위 말하는 일진이라는 아이들이었다. 선생님들이 이따금씩 불시에 가방 단속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크게 강력한 제재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 역시도 통제를 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속아주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귀찮았으니까.

 한 번씩 가방 검사하는 날, *학주가 뜬다는 첩보가 반으로 흘러들어오면 담배를 가진 애들은 숨기기에 바빴다. 대부분의 양심이 있는 일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리를 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본인의 생리대 안에 숨기던가. 양심에 털이난 일진은 가방 검사를 대충 할 거 같은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모범생들에게 그들의 담배를 가지고 있기를 강요했다. 나 같은 아이들 말이다.

*학주=학생 주임의 줄임말. 주로 체육 부장이 맡았고 아이들의 생활 태도, 학교 폭력 등을 감시했음

 

  나는 중학교 입시인 배치고사에서 전교에서 5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 당시 한 반의 인원은 35-40명에 전체 열반이 넘었고 그러면 적어도 300명 이상 중에서 5등을 한셈이 된다. 일등이 만점, 내가 2개를 틀렸는데, 나와 같은 점수의 전교 5등이 세명 정도는 있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아무튼 나는 전교 5등을 하여 반에서 일등으로 입학을 했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키는 160 정도에 깡말랐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의 음악 선생님이었다. 또한 교육에 크게 열의는 없으며 정시에 퇴근하길 선호하고 아이들이 귀찮은 짓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요즘으로 치면 워라밸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첫날 일등으로 들어온 나의 이름을 호명하고 임시 실장으로 임명했다.

 우쭐하고 인정받는 걸 좋아한 나는 남들이 나를 칭송하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입학식 첫날 내 이름이 불러졌을 때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 임시 실장에는 만족한 기분이 들지 않아 정식 실장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실장 선거는 반 전체 앞에서 공약을 거는 발표를 한 뒤 비밀 투표로 진행이 되었는 데 당시에 압도적인 표 차이로 내가 실장이 되었다. 나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아이여서 당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부실장인 아이가 실장이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나의 촉에 불과하지만, 내가 실장이 되었을 때 조심스럽게 내게 "실장이 되면 반에 필요한 비품들이나 화분을 사야 하는데 괜찮겠냐"며 물은 걸로 봐서는 부실장의 재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네 물론이죠. 준비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삼 남매를 키우는 데 하루를 보내기도 버거워하는 엄마에게 그날부터 생떼를 쓰며 조르기 시작했다.

 필요한 물품은 책장, 화분과도 같은 교실에 비치하는 용품들로 사실 책장 이런 건 꼭 원목의 것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일 년이 지나, 반이 바뀌면 다시 교실 환경 미화 겸 재정비를 하는 데 그럴 때 으레 옛날의 것들은 버리고 다시 구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목으로 만든 책장을 구입하자며 엄마를 닦달했다. 그러면 엄마는 한 없이 곤란해하며 한숨을 푹 쉬고 얘 또 이런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 때, 전교 부회장직을 맡았을 때도 우리 엄마를 엄청 괴롭혔었다.

 왜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하는 걸 좋아했느냐.

 어렸을 때부터 유독 눈치가 빨랐던 나는 어른들의 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글로 쓰면 논란이 될 거 같아 소심히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치맛바람이라고 일컫는 존재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알았던 거 같다. 치맛바람은 내가 공부를 잘할수록 곤란해했다. 내가 반장이 되거나 하는 것도 불쾌해했다. 내가 전교생 대표로 무엇인가 상을 받는 거에도 언짢아했다. 그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나는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이겨보려고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어떻게든 인정받으려고 했던 거 같다.

 지금은 안다. 치맛바람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출발선부터가 다르므로.

 내가 엄마를 몇 날 며칠을 졸라서 샀는 원목 책장이 교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 혼자만 뿌듯해했다는 걸 알아챘다. 선생님은 왜 이렇게 얘는 오버해서 굳이 이걸 사온 거지라는 눈빛을 보내셨지만 나에게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렴." 하셨다. 대신 그다음 날 부실장이 당선된 기념으로 맥도널드 버거 세트를 반 전체와 교무실 전체에 뿌렸을 때는 "호호호 얘는 뭘 이런 걸 다.. 어머니께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라고 하이톤으로 웃으며 말했다.

  일 학년 학기 내내 전교 10등 내/반 1등은 유지했지만 우리 집은 나를 학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 성적은 2 학년부터 10등~30등 사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에서 2-3등쯤은 했지만 중학교 2학년 이후부터는 아무리 노력해도 전교에 10등 안에 드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모르겠다. 내 노력이 부족했거나 내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거나. 그즈음 해서 나는 공부에 흥미가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이윽고 전교 30등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는데 나는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점수를 올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다.

  당시에 자유로워 보이는 일진애들이 부러웠다. 한 번은 내 옆에 소위 일진 중에서도 간판(전교에서 제일 예쁜 애를 칭하는 당시의 비속어)이라는 친구가 앉았는데, 그녀에게도 물론 내가 모르는 많은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남의 눈치는 보지 않는 독자적인 영혼으로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용기가 쥐똥만큼도 없어서 그녀는 나에게 그들만의 사는 세상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EBS 듣기 평가가 진행이 되는 날이었다. 이 듣기 평가는 전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 음향 사고가 나지 않을까 사전에 꼼꼼히 점검을 하고 시행이 된다. 그리고 평가 도중에는 절대 음향에 거슬릴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기침이나 덜컹덜컹거리는 의자 소리는 일절 금물이다. (하지만 꼭 이럴 때 기침이 나올 거 같은 적이 한두 번은 있었다.) 여하튼 모두들 굉장히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데 막 2번 문제가 끝났을 때 내 뒤에 앉아 있는 간판이 연필로 내 등을 찌르기 시작했다. 처음 한 번은 잘못 찔렀다고 생각을 했는 데 두 번째에도 어김없이 찌름이 느껴져 왼쪽 어깨 사이로 살짝 흘겨보니 간판이 입모양을 뻐금대며 몇 번이냐며 묻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커닝을 시도했던 것이다. 순간 선생님의 위치를 살펴보니 교탁에 있던 그는 다행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세 개를 겨드랑이 밑으로 표시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내 등을 연필로 쑤셔댔지만 선생님이 냄새를 맡았는지 우리 근처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더 이상 그 행위를 그만두었다.

 시험이 끝나고 그녀는 나에게 다와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혜미야, 너 되게 착한 사람이구나."

  내가 듣기 평가 2번 문제의 답이 3번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 그녀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릴만한 일이 되었다. 일진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기준이 내게는 일탈 행위가 되었다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약간의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가 아등바등 거리며 잡으려고 하는 것들이 결국은 잡히지 않을 거라면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들의 시선을 중요시 여기고 칭송받길 원했으므로 그 이후로도 공부를 손에 놓치는 않았다. 대신 나는 중학교 3학년을 마치는 겨울 방학 때, 반곱슬이었던 머리카락을 설에 받은 용돈을 탈탈 털어 매직 스트레이트를 하고 분홍색 *엘레쎄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샀다. 고등학교 때는 놀아 보겠다고.


*당시 필라, 엘레쎄, 미키마우스 등 초등학생이 드는 가방과 신발주머니 세트가 노는 무리에서는 유행이었다.





 

 

이전 09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 1호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