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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라 Oct 22. 2023

오버부킹의 주인공이 되다

지진이 난 튀르키예로 가다 (10)

1. 육체를 죽이지 못하는 힘


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막 도착했을 땐 추웠는데 이제는 제법 날씨가 선선해진 것도 같았다. 여전히 샤워는 한 번도 못한 상태였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차디찬 물에 머리를 감던 것도 조금 더 하면 완벽하게 적응이 될 것만 같았는데 떠난다니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사실 이런 생활이 계속될 게 아니란 걸 알아서 그럭저럭 참고 잘 적응했는지도 모르지만, 지진이라는 나는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재해 앞에서 인간의 크고 작은 필요라는 게 참 무색하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저 아무것도 잃지 않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거나 내가 더 운이 좋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앞에서 잠을 더 잘 자거나 조금 더 잘 먹는 것, 그 모든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우리의 베이스캠프였던 학교 앞에 대절버스가 도착했다. 짐들을 다 싣고 출발하는 그 날 아침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해가 쨍쨍하고 시원한 날씨였다. 우리는 곧 두 시간 쯤을 달려 샨르우르파 공항으로 가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었다. 귀국 전 잠시 호텔을 들러 씻고 식사한 후 마지막 모임을 갖고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늘 그렇듯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가능하다면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샨르우르파의 작은 호텔을 빌려 대충이나마 개운하게 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감 등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야말로 감동과 눈물의 자리였다. 모두 다 우리가 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곳을 보고 계시고 앞으로 더 많은 생명들이 살아날 것을 믿는 마음을 고백했다.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수많은 죽음과 아픔과 비극이 지나간 땅에 다녀온 우리가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이.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실이었다. 우리가 본 것은 수많은 죽음과 고통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불모의 땅에서도 꺾이지 않은 생명들과 그들 가운데에서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명력. 어쩌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주었던 그 힘. 그 사랑. 우리 안에도 있는 것. 육체를 죽일 수 있는 것이 결코 죽이지 못하는 것.  


우리는 그것으로 살아가리라. 남은 사람들도 그것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마음껏 축복하며 그 땅을 떠날 준비를 했다.



2. 오버부킹의 주인공, 그게 누군가 했더니


그렇게 샨르우르파를 떠나 이스탄불로 도착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보딩 시간에 맞춰서 게이트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튀르키예인 승무원 두 명이 우리 쪽에 찾아왔다. 그리고 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저희 항공 예약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승객 한 명이 오버부킹되었습니다. 혹시 내일 떠나는 비행 일정이 괜찮으신 분 있으십니까? 호텔은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괜찮은 사람이 있을 리가. 우리는 팀으로 왔기에 팀으로 떠나야 했고, 누가 혼자 남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물어보러 다녔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고, 누가 그걸 바꿔 줄까 하는 의문밖엔 없었다.


그런데... 체크인하고 비행기로 탑승하러 들어가려던 그 시간 내 여권과 보딩패스를 확인한 직원이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몰랐다. 내가 그 불행한 오버부킹의 주인공이었다는 걸. 국제선이라 비행기도 꽤 클 텐데. 왜 그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란 말일까? 우리는 비행기도 다 단체로 예약했는데 왜 나만? 직원들이 우왕좌왕하고 어디론가 심각하게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불안해졌다. 이미 구호팀원 분들은 다 탑승했고, 체크인을 마치고 내 상황을 지켜봐주던 동료 한 명이 기다려주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순간 심하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꼭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만 혼자 남기는 싫었다. 아무리 하루 차이라고 해도. 이 모든 걸 같이 끝내고 같이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긴 통화가 끝나고 다행히 자리는 변경되었지만 탑승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단체로 예약했기에 자리도 가깝게 앉는 것이었는데, 새로 발급해준 보딩패스의 자리는 나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래도 집에 갈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탑승했다. 하지만 자리를 확인한 나는 감사하기가 어려웠다. 왠만하면 장거리 비행에서 가운데 자리는 옆에 아는 사람이 앉지 않는 한은 피하려고 하는데 가운데 자리였고, 내 양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들이었다. 이런 것에 은근 예민한 나로서는 썩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어려웠던 건, 팀원 중 몇몇 분은 비즈니스 클래스로 자리가 업그레이드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딱히 기준은 없고 랜덤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오버부킹 되어서 몇십 분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던 것도 모자라 원래 비즈니스석 뒤쪽의 나름 쾌적한 자리에서 두 명의 몸을 뒤척이는 아주머니 사이로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나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왜 저만 이런 자리를 주신 거죠? 


방금까지만 해도 어려움에 적응할 수 있다느니, 더 큰 어려움 앞에서 먹고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느니 하는 생각을 했던 나는 어디론가 온데간데없이 가고, 비즈니스석을 같은 가격으로 이용한 팀원들 때문이라도 내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열한 시간 정도 비행으로 잠을 자야만 버틸 수 있는 비행이었건만 잠도 쉽게 들지 못하고 몸은 너무 피곤할 뿐더러 양 옆이 신경쓰여 예민해졌다. 차라리 외국인들이 앉았다면 신경쓰지 않고 일기라도 썼을 텐데. 그렇게 도착을 두세 시간 남겨두고 기내식이 왔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 왼쪽에 앉은 아주머니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교회 사람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오시는 길이었고, 나의 오른쪽에 있던 분과 일행이었다. 아주머니는 조선족, 교포 분이셨다. 조금은 어색하게 들리지만 한국말을 잘 하셨다. 연화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아주머니는 이스라엘에 많은 기대를 하고 가셨지만 대부분 관광을 목적으로 상업화가 많이 되어 있어서 아쉬웠다고 말씀하셨다. 꼭 그곳을 가야만 느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던 곳의 발자취를 보려고 가신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다고 하셨다. 그분도 내가 무엇을 하고 왔는지 궁금해하셔서 설명을 드렸는데 정말 귀한 일을 하고 왔다면서, 무섭지 않았느냐. 힘들지 않았느냐며 놀라셨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신앙 이야기, 가족들 이야기 등 삶의 어려움들.. 그러던 중에 아주머니가 내가 가끔 생각나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나는 그때 깨달았다. 왜 내가 이 자리로 와야만 했는지를. 비즈니스석에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을 누리기 위해 와야 했다. 그 우여곡절을 거쳐서. 


그래서 나는 남은 비행을 감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인생이란 건 가끔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려움의 시간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분명히 나는 그런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의미가 있었다니. 누군가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서 돈을 주웠다면 몰라도, 만남이란 정말 우연을 뛰어넘는 운명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단순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약 오버부킹의 어려움도 없이 비즈니스석을 타는 행운을 누렸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뻤을테지만, 오늘 이렇게 기록까지 할 정도로 기억했을 것 같지는 않다. 불편하고 힘들었던 상황이 결국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었을 때 그 일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도 나에게는 곧 축복이 되리라. 


지진이 휩쓸고 간 땅에도 꽃은 피어나리라.  


창 밖 너머로, 인천의 바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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