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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n 06. 2024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되나요?

나아지리란 희망은 없지만 나아지고 싶은 마음

금요일 오전. 제주에 와서 개인적인 일로 시내에 나가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괜히 기분이 들떴다. 들뜬 기분이 어색해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멀리 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집안을 단정하게 해놓고 싶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예약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병원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약을 했는데도 대기가 길었다. 나처럼 아픈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 안심도 되었고 어떤 일로 왔을까 내심 궁금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차례가 왔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작년 12월 육지에서 받아온 소견서를 내밀었다.


의사 선생님은 소견서를 읽고서는 왜 지금 왔냐고 물었다. 소견서 발행날짜는 12월이고 지금은 5월의 반이 지났는데 왜 이제야 왔냐는 뜻이었다. 하. 뭐랄까. 단전에서부터 설명하기 굉장히 귀찮은 마음이 묵직하게 올라왔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야 약을 받아갈 수 있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제주에 와서 잘 지내서 한동안 약을 안 먹고 지냈어요. 그런데 최근에 시댁일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로 멘탈이 터져서 고장이 난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발작버튼이 눌렸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일이 있고 남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말다툼도 하고 자괴감이 들어 자살생각을 할 만큼 괴로웠고 임시방편으로 먹던 약이 다 떨어져서 왔어요. “

“시댁일이라면 어떤 걸까요?”

“별일은 아닌데... “


시댁일이라는 말에 9년의 서사가 머릿속을 지나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9년의 서사를 꾹꾹 눌러 담아 단 몇 문장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할애된 짧은 진료시간에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했고 동시에 귀찮았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 그런 걸까. 시아버지 노쇼 사건에 대해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기분이 나쁘셨겠어요.”


나는 그 말에서 어떤 위로나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적절한 위로와 공감을 해주셨는데 그걸 느껴야 하는 내 마음이, 내 감정이 마비된 것 같았다. 무감각.


잠은 잘 자는지, 평소에 하던 집안일도 무리 없이 잘하는지, 씻는 건 잘 씻는지, 하루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등 일상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여느 다른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같이 간단하게 검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고 나는 듣자마자 ’아, 또‘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귀찮았다. 정신과에 처음 내원을 하면 매번 하는 일이려니 했지만 이제는 문항들을 대충 외울 정도였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검사는 끝났고 검사결과를 들을 차례가 왔다. 의사 선생님은 모니터를 내가 앉은 쪽으로 돌려서 각종 그래프와 수치들을 보여주며 결과를 말했다.


“다행히 성인 ADHD는 아니시고 심한 우울증이세요.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세요.”


성인 ADHD 아니라는 말 앞에 다행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자꾸 기억력이 고장 난 것 같다는 나의 호소에 대한 검사 결과였다. 나머지는 뭐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네. 맞아요. “


“그냥 빨리 약이나 주세요. 또 나오기 귀찮은데 한 달 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되지도 않을뿐더러 의사 선생님에게 불쾌감만 줄 뿐이라는 걸 지난번 정신과에서 경험했기에 얌전히 앉아서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지 물었고 이 상황이 매우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껴져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감정기복이 있으신 걸로 나오세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떨 때 기복이 있으신 거 같으세요?”

“글쎄요. 그냥 뭐.”

“마음은 자주 들여다보시나요?”

“뭐 들여다본다고 달라지는 것 같지도 않고 힘만 들어서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아요.”


마치 입은 속세의 고통에 대해 해탈한 스님처럼 떠들고 마음은 약처방을 기다리는 나약한 중생의 모순적인 내 모습이 우스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되나요? “

마치 이렇게는 살기 싫고 나아지고 싶은 본능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양가감정이 들었다.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마음과 나아지고 싶은 마음의 공존.


“그럼요. 원인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

“그렇군요.”

“아침약은 기존 약에서 조금 바꾸고 저녁약은 그대로 일주일치 드릴게요. 드셔보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진료실을 나왔다. 귀찮음으로부터 약간의 해방감이 들었다. 진료실을 들어가기 전과 후의 차이는 약을 처방받았다는 것 외엔 없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수순 그대로였다. 정신과는 처음부터 길게 약을 주지 않는다. 예전에 다니던 곳들도 그랬다. 다음 주 예약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자꾸 마음속에 메아리가 친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되나요?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게...... 도움이.. 될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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