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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숲풀 Mar 27. 2022

인생 클레임 처리 매뉴얼(4)

개선활동

방전된 에너지 충전하기


모든 것을 소진한 번아웃이었던 나는 제대로 된 개선활동을 위해 꼭 ‘쉬는 활동’이 필요했었다. 당시에는 '내가 하는 게 고작 이거라니’ 혹은 ‘난 이것밖에 못하는구나’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야말로 제대로 된 활동이었다.     


일단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 그동안 늘 열심히 달리기만 했던 것이 습관이 되어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기력해서 뭔가 하지는 못했지만 안 하고 있으면서 불안해하고 그런 나를 스스로 한심해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일단은 쉬는 게 필요했다. 어딜 갈 힘도 없어서 방에 틀어박혀 계속 누워있었다. 정말 아주 약간의 힘이 생기자 스스로 나서서 더 쉬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어졌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무계획으로 떠난 바닷가에서 의자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이고 파도소리를 듣고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라도 평온해졌다.     


원인 제공자에게서 벗어나기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인 가스 라이팅 하는 상사를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직을 하기에는 이미 자존감이 너무 낮아져 있어 두려웠고 그냥 퇴사를 하자니 생계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증상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더는 버틸 수 없어 결국 퇴사해버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준비되지 않은 앞날이 정말 두려웠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말처럼 원인 제공자에게서 벗어나자 일단 숨이라도 쉴 수 있었고 많은 신체적 증상이 꽤 사라졌다. 물론 문제 해결이 필요하거나 발표, 보고 등의 상황에서는 증상이 다시 나타나곤 했지만 매일 매 순간 힘들었던 과거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든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동안 2차 개선활동을 할 시간과 상황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도움 청하기

품질 담당자라고 해서 클레임이 발생하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지는 않는다. 나는 화장품 분야였기에 내용물 문제면 연구소, 용기 문제면 구매나 디자인팀, 생산 문제면 제조사 등 유관부서와 함께 해결하기도 했다. 즉, 인생 클레임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이야기에 앞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당시 나는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 생각한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지거나, 돕는다며 더 비수를 꽂은 적도 있었다. 그로 인해 겨우 생긴 힘마저 다시 다 빠져버리고 증상이 더욱 심각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의 방법’을 몰랐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나는 그 기회로 직접 경험하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된 것이기에 누군가를 돕고자 이 글을 쓰게 되지 않았느냐며 스스로 위로 중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도움을 청했던 경험을 적어본다.


당시 그런 부정적 경험도 했지만 믿었던 그 사람들 중에는 다행히 아무 조건 없이 지지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온전히 내가 겪은 사건과 감정을 모두 이야기했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이미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는 말을 꾸준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겪는 회사 내에서의 고충도 들으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님을 알고 위안받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원래 사회생활은 다 힘든 거야.’라고 직접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까지도 내 자존감 지킴이이고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용기를 내서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에 가서 상담도 해봤다. 금전적 여유도 없고 정신과에 대한 주변의 걱정, 그리고 비난 아닌 비난에 꺼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겨우 힘들게 갔는데 내 잘못이라고 부정당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 악화되면 내 발로 가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병동에 입원하거나, 가야 할 내가 없어지거나 할 것 같아서 어렵게 방문했다. 결과는 꽤 좋았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한다고 한순간에 우울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태도나 말투 하나에 상처받은 적도 분명 있었지만 적어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횟수나 그 깊이만큼은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에 깊게 집중을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얘기지만 나는 이런 경험 때문에 정신이나 심리 문제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가 너무도 간절해졌다.      


한참 가스 라이팅 당하던 당시 회사 동료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 동료는 그 전 직장에서도 함께 일하던 사이였는데 같은 경력에 나이는 나보다 어린데도 존경심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시 함께 일하기로 했고 내 고통의 일부를 함께 겪어주거나 하소연을 들어주곤 했었다. 지금은 언니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새 인생을 찾아가는 나를 역시나 응원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가스 라이팅 한 상사와도 아는 사이이신, 지금은 은사님이라고 칭하는 상사분과 일할 때였다. 자꾸 일을 그르치는 기분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해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이해해주셨고 오히려 직접 겪은 인생의 좌절의 순간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공감해주셨다. 내 힘든 감정에 대한 경중도 따지지 않으셨다. 업무에 대한 도움을 주실 때도 가능한 한 답보다는 방법을 알려주시며 키워주셨고 두려움에 대해서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해보고 실천해보도록 안내해주셨다.     


나의 가족 역시 소중한 지지자였다. 물론 내가 아프게 된 과정에 기여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어쨌든 이 나이가 되도록 삶의 방향도 정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할 법도 한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지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나와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나를 잘 이해하고 응원해 준 학교 동생과 두 명의 회사 후배, 자존감에 영향을 줄 사건들이 있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막아주는 사회에서 만난 번아웃 회복 선배이자 친구, 자존감 스피치 프로그램 대표님, 자아 정체성을 찾게 해 주신 비전 프로그램 대표님 등 고마운 인연들이 있다.



성취감 느끼기

앞선 단계들로 힘이 생겼으므로 본격적인 개선활동을 할 차례였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그 정도가 약해졌을 뿐,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말 작은 성취감부터 느껴보려고 했다.


뭔가를 돌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식물 키우기를 시작했다. 다만, 쉽고 성과가 금방 보여야 지치지 않을 것 같았고 실용성도 있었으면 했다. 새싹보리를 키웠다. 수경재배라 어려울 것도 없었고 정말 쑥쑥 자라서 일주일이면 먹을 수 있었다. 그 시기쯤 밖에서는 네잎클로버를 하나둘씩 찾으며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100여 개쯤 찾게 되었을 때는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기쁨도 알아갔다. 결국 직접 키워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씨앗을 구매해 정성을 들였고 지금은 많은 잎이 잘 자라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돌볼 수 있구나 싶고 잘 자라주어 기쁘다.     


회복을 위해 일부러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쯤 집에 강아지가 오게 되었다. 원래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는데 온전히 나를 사랑해주는 아이와 교감하는 것은 정말 큰 행복이었다.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스킨십도 회복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강아지를 매일 쓰다듬고 안아주며 교감하는 것 또한 큰 효과였던 것 같다. 만약 누가 없다면 스스로 쓰다듬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강아지를 키우며 주말에는 꼭 산책을 직접 시켜줬는데 햇빛도 많이 받고 자꾸만 움직이면서 체력이 좋아져서 나중에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번아웃과 우울증을 앓는 동안 폭식과 과식, 무기력한 생활로 인해 20kg이 넘게 살이 쪄서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건강한 식단과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도 목표를 과하게 두면 또 나에게 실망할 것 같아서 그냥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기로 하고 진행했다. 수차례 정체기가 와도 ‘나는 어제는 계단 20층을 올랐고, 오늘도 샐러드를 먹고 스쿼트 50개를 했다’는 그 사실은 존재했다. 그렇게 천천히 1년간 18kg을 감량했고 건강을 되찾은 것은 물론 엄청난 성취감도 따라왔다.


일하는 공간과 달리 방은 대청소 날 이후에는 늘 어지러웠다. 그게 좋은 것도 아니고 답답해하면서도 쓸데없는 완벽주의 때문에 완벽히 깨끗하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미루고 또 미루며 지냈다. 하지만 작은 성취감을 알게 된 후에는 정리정돈 대상 공간과 양을 소분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제는 서랍장, 오늘은 옷장, 내일은 청소와 쓰레기통 비우기 이렇게 시작했다. 나중에는 엄마의 손을 빌려 냉장고, 창고, 발코니 등 확장해서 정리정돈을 했다. 뿌듯한 것은 기본이고 깨끗해진 공간은 마음까지 환기시켜 주었다.    


무언가 배우는 성취감이 크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두려워 시도를 못했었다. 재미를 못 느끼거나 못 하는 나 자신을 한심해하거나 꾸준히 나가지 못해서 또 좌절할까 봐서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은 원데이 클래스였다. 해보고 싶었던 여러 가지를 전부 원데이로 배웠다. 그중에서 잘하고 재밌는 것만 다음 회차에서 또 해보면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 혼자 고민하지 말고 지인이나 배우자 혹은 회사에 멘토를 두어 상담을 한다.
* 되도록 정해진 업무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하고, 퇴근 후에는 집으로 일을 가져가지 않는다.
* 운동, 취미 생활 등 능동적인 휴식 시간을 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아웃 극복법


* 우울증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목적을 세우고 합리적인 책임감을 세우십시오.
* 과도한 일을 멈추고, 일의 우선순위를 세우며, 가능한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누군가에게 증상에 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은 혼자 비밀로 하는 것보다 종종 더 나은 감정을 갖도록 돕습니다.
* 당신을 즐겁게 만드는 활동에 참여하십시오.
* 가벼운 운동, 영화보기,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활동들에 참여하는 것이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 당신의 기분이 급작스럽게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분은 점차적으로 향상되며, 기분향상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 우울증이 호전될 때까지 중요한 결정은 잠시 미루는 것도 좋습니다. 직장을 바꾸거나, 결혼하는 것 또는 이혼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당신을 잘 아는 사람과 상의해야 하며, 당신의 상황에 대해 보다 객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 사람들은 좀처럼 우울증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조금씩 그들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 기억하십시오. 긍정적인 사고가 우울증의 한 부분인 부정적인 사고를 대치하게 될 것이며, 치료를 통해 당신의 우울증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당신을 돕도록 하십시오.

[네이버 지식백과] 우울증 대처방법 (차병원 건강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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