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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Oct 14. 2022

성수 대교를 건너며

남겨진 자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2580&cid=46634&categoryId=46634

*성수대교는 제가 종종 건너 다니는 다리입니다.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는 듯 새로 지어진 다리엔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다닙니다. 오늘도 성수대교를 지나면서 문득, 그날이 떠올라 지인 동생의 사연을 토대로 몇 년 전 썼던 글을 꺼내어 브런치에 올려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는 아주 오래된 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94년 10월 21일 그날의 얘기. 가랑비 흩뿌리던 어느 가을, 영혼을 공유하던 친구는 홀연히 내 곁을 떠났고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외롭고 힘들다.


 “당신의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거나 글로 표현해보는 건 어때요?” 매년 반복되는 재난 사고에 분노를 넘어 알 수 없는 자살 충동과 우울증으로 찾은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나는 정말 말하고 싶어졌다. 다리를 짓고 건물을 올리고 선박을 출항하고 안전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회에게 이 국가에게 내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미화와 친해진 건 등교 버스 덕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늦은 봄 , 갑자기 이사를 오면서 나는 늘 걸어 다니던 학교에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 다녀야 했다. 한 번도 버스 등교를 해본 일 없는 나는 전학도 고려했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익숙한 중학교 생활이 더 소중했다. 미화 역시 나와 같은 이유로 1년 전부터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안경 쓴 동그란 얼굴에 늘 옛날 여고생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따고 다소곳이 잘 웃던 미화, 등하굣길을 같이하게 된 우리는 너무나 가까워졌다. 버스정류장 앞 포장마차는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어묵 한 꼬치라도 먹었고 각자 반이 다른 까닭에 담임 얘기부터 그날 각자 반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 이야기까지 수다 떠느라 집에 가는 버스를 서너 대 놓치기 다반사였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쉬워 미화네 동 쪽으로 돌거나 우리 집 쪽으로 돌아가거나 하면서 오래도록 걷고 이야기했다. 어느 한쪽이 청소당번이 걸리면 서로를 위해 일찍 등교하고 늦게 하교했고, 시험 때면 서로의 집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다; 각성제를 먹기도 하고 커피도 마셨지만 둘 다 잠을 이기진 못했고 이른 아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떠 '으아악 망했다!!' 소리를 지르고 미화 엄마나 우리 엄마가 정성껏 차려놓은 아침밥상 앞에도 앉지 못하고 내달려 학교에 갔다. 시험이 끝난 날은 크리아트나 터미널에 가서 액세서리나 옷가지 몇 개를 사고 영화를 보고 또 한강고수부지에서 컵라면과 꼬마 김치를 사들고 벤치에 앉아 호로록 채 익지도 않은 면발을 삼키며 아 맛있다 맛있다 하며 웃고  수다 떨고... 다음 시험부턴 꼭! 밤샘해서 일 이등 하자고 약속했는데. 스승의 날엔 각자 짝사랑하는 선생님 선물을 사느라 마트를 돌고 백화점을 돌고 카드엔 뭐라고 쓸까 의논하고 그게 좋다 이게 좋다 말다툼하다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가.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너희 둘은 화장실도 같이 가고 화장실 안에도 같이 들어가냐 어떻게 그렇게 붙어 다니냐고  하셨었다.  미화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져 그렇게 자잘한 일상과 꿈을 나누고 고등학교도 같은 곳에 가자고 약속했다.  


 그날은 내가 몸이 아팠다. 열이 나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날 깨우러 오신 엄마가 오늘은 학교에 못 갈 것 같다고.. 학교에 전화해야겠다 그러고 나가셨다. 꿈결에 미화가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나는 우산을 씌워주며 “미화야, 우산도 없이 웬 청승이냐. 서방님 기다리냐.” 놀리는 듯한 내 말에 미화가 글썽이던 눈물을 거두고 활짝 웃었다. “걱정했잖아 이 기지배야!! 버스 두 대나 지나갔어!!”

미화의 생생한 목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 미화가 날 정류장에서 기다릴 텐데!! 미화네 집에 전화를 하니 미화 어머니가 “진작에 미화 나갔는데? 유진이 너 학교 못 가는 거야?” 하셨다.

 꿈결에 비가 내렸는데 창 밖에도 주룩 주록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화는 혼자 학교에 갔을까... 미화야 미안해 미안해 아파서 미안해 연락 빨리 못해서 미안해... 나는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고 비 맞은 듯 온몸이 젖은 채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미화와 내가 하루 두 번씩 지난 늦봄부터 버스를 타고 함께 건너던 그 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 아는 한국말인데도 이해가 안 갔다.  나랑 상관없는 뉴스일 거라 생각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미화는 그날 아침 오지 않는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한 대 두 대 세 대 학교 가는 버스를 보내고 가랑비 속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시계를 보고 이러다 지각하겠다.. 유진이가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하며 마침내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버스를 타서도 혹시나 내가 뛰어올까 틀림없이 창 밖을 내다봤을 것이다. 내가 그날 아프지만 않았으면 오늘은 학교 못 간다고 조금만 일찍 전화해줬더라면... 미화는 사. 고. 전. 에 무사히 지나갈 버스를 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미화와 나는 지금 똑같이 서른여덟 살 일 것이다. 여전히 내 친구로 남아 우리는 수다를 떨고 맛있는 것을 먹고 어쩌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남들 다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미화의 사고는 내게 갚을 길 없는 큰 빚과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남고 말았다. 사죄하고 하소연할 길 없는 나는 점차 병들어갔고 대학입시 때도 진정하고 싶은 국문학을 뒤로하고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 결혼도 아이도 내 인생 계획에서 지운 건 미화를 잃고부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전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이없이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상상 때문에 너무 무서웠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두 번 다시 겪어선 안된다고 다짐했다. 가족을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먼 과거 중학교 시절 친구를 잃은 것 갖고 수 십 년 그렇게 사는 건 네가 나약해서라고, 자식도 가슴에 묻고 부모도 잃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유난 떨지 말라고... 그 말이 몇 배는 더 아팠다. 부모형제보다 친구가 소중하던 사춘기 소녀시절 미화는 가족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지금까지 미화 같은 친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22년 동안 나는 새로 지은 성수대교를 건너지 못했다. 꼭 가야 한다면 다른 길을 모색해 돌아갔다.      

 

 성수대교 사고 이후로도 끔찍한 사고는 연이어 터졌다. 뉴스를 보고 전쟁이 난 줄 알았던 삼풍백화점 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그리고 세월호까지.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로는 몇 달을 어찌 지냈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들을, 정을 담뿍 나눴던 가족 같은 친구들을, 백화점에서, 혹은 지하철을 타다가 그리고 학교 수학 여행길에서 잃어버린 기막힌 현실이라니.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파 회사에 아예 휴가를 내고 망연자실해있던 나는 결국 그 해 여름 정신과를 찾았다. 나와 내 가족이, 내 지인들이 안전한 것에 감사하는 것이 죄스러웠고 그보다 어쩌면 다음 재난사고의 주인공은 온전히 나와 가족, 친구들의 몫일 수 있다는 불안감도 쑥쑥 자라 나를 덮쳤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처럼 세상을 향해 20년도 넘게 꼭꼭 눌러왔던 내 슬픔과 아픔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내 사연이 혹시나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아주 조그마한 주춧돌이 될 수 있기를. 이제는 더 이상 아무 이유 없이 가족이나 친구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이 없기를. 내 얘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중엔 누군가 안전을 위해 더 정성을 쏟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내 안에 싹트고 있다.


P.S  어김없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왔습니다.. 하늘, 습도, 기온, 그리고 바람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날씨지만 10월은 가끔씩 코가 시큰합니다. 벌써 28년이나 지났네요. 94년 10월에 성수대교가 무너졌어요. 그리고 30년이 다 돼가도록 그 아픔 속에 사는 가족들이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재수가 없어서 어이없게 목숨을 잃고,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평생을 죄책감과 그리움에 삽니다. 

부질없는 바람이지만 세상을 등지는 일이 순서대로, 그리고 기약을 두고 가는 것이라면 적어도 죽음만은 모두에게 공평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안전사고는 장소와 원인을 달리하여 끊임없이 일어나고 지난 사고는 묻힙니다.

언제가 되어야 적어도 인재로 인한 슬프고 잔인한  죽음을  안 보고 안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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