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귤꽃- 1화>>
희수는 결혼 후 신도시에서 살았다.
“다들 그래요. 천국 같은 동네라고.”
누가 물으면 항상 당연한 듯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고개만 까딱하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했고, 단골 카페 사장과도 이름 한 번 주고받지 않았다. 아는 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의였다.
코로나 이후 새로 뽑힌 아파트 동 대표는 희수를 주민으로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신도시는 조용한 사람에겐 말없이 살기 딱 좋은 곳이었다.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수도 있겠구나.’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잘 갖춰진 동네는 딱히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생 된 딸아이의 통학 문제로 이십 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사 온 곳, 청심동ㅡ이곳은 보이는 것부터 달랐다.
아파트 베란다 너머 광경은 정리되지 않은 과거와 현재의 삶이 뒤엉켜있었다. 오른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아슬아슬하게 집들이 매달려있는 절벽마을이 보였다.
눈앞에는 다가구주택과 주상복합아파트에 빙 둘러싸인 채 막다른 골목 귀퉁이에 몰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자리를 버티고 있는 무허가 판잣집이 있었다.
그 뒤에는 초등학교, 그리고 아파트가 보였다. 왼쪽은 큰길 건너로 또 이곳과 비슷하게 생긴 언덕진 마을과 먼발치 그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빌딩들이 보였다.
절벽마을 초입엔 1960~70년대에 지어진 오막살이집 몇 채가 같은 벽에 기대어 몸을 맞댄 채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오각형도 육각형도 아닌 얼기설기 지어진 시멘트집은 지붕 위에 검은 비닐을 치고 폐타이어를 올려놓았다.
가장자리를 버팀돌로 눌러 놨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지붕은 들썩 거렸고 비닐 처마가 펄럭대는 모습은 마치 집이 웃었다 울었다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마을 중턱은 좁은 땅에 억지로 끼워 맞춘 다가구주택들이 층층마다 빼곡하게 차있었다.
옥상은 온갖 작물을 키우는 제각기 모양의 화분들과 장독들로 또 빈틈없이 빽빽했다. 옥탑 방을 가로지른 빨랫줄만 너른 했다.
축 쳐진 줄 위로 여러 색의 옷가지가 날개 짓 하듯 퍼덕거렸다.
언덕마을 꼭대기는 유독 전망 좋은 자리에만 새로 지은 통유리 건물과 단독주택 몇 채가 솟아 있었고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번지르르했다.
마을 아래 보행자도로에는 시멘트만 덩그렇게 올려놓은 채 공사가 중단된 건물이 거대한 벽을 세워놓고 버티고 있었다.
경고장이 붙어있는 입구의 녹슨 자물쇠 아래로 구슬픈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행자 머리 위에는 타워크레인이 도로 전체를 가로질러 무언가를 매단 채 허공을 향해 멈춰있었다.
‘유치권 행사 중’이라고 붙어있는 공사장 주변 여기저기에는 ‘신속통합기획 확정’이라는 재개발 추진현수막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초등학교에선 다문화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어깨를 부딪치고 깔깔 웃으며 크레인 아래를 아무런 통제 없이 지나다녔다. 아이들은 좁은 도보 탓인지 공용 자전거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언덕 위 골목길 긴 계단을 혼자 걸어서 올랐다. 계단 끝엔 뜯어진 쓰레기봉투 옆으로 젖이 불은 어미 고양이가 지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언덕아래 평지와 지하철역 주변에는 비교적 모양을 갖춘 아파트들이 있었다. 아랫동네 아파트들과 윗동네 절벽마을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하나는 오늘이고, 하나는 어제였다.
그 어지러운 광경에 오히려 마음이 끌렸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만들 것 같은 동네, 투박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력 같은 게 느껴졌다.
희수는 전입신고를 하러 주민센터에 갔다.
벽에 붙은 빛바랜 포스터들과 오래된 안내판을 보며 이제부터 살게 될 동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씩 욱신거리며 뭔가 아련해왔다.
문을 열자 창문 하나 없이 막힌 공간에 말소리가 가득했다.
외국인 근로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노인이 많았고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들어주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주민센터에는 묻고 또 묻는 질문과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대답 사이로 사람을 품어온 선한 정이 스며있었다.
서툰 것에 스스럼없는 모습에서 사람 사는 기운 같은 게 보였다. 희수는 두 배쯤 느리게 돌아가는 그 소란함 속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기는 좀 오래 걸리겠네...”
순번표를 뽑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기석 뒤 책장마다 어린이 책이 빼곡했고, 복도 진열장에는 잘 관리된 대여용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붕붕카를 탄 아이 곁에서, 외국인 엄마가 다정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색도, 피부빛도 달랐지만, 그곳엔 따뜻함이 감돌았다.
서로 다른 얼굴들, 다른 말투, 다른 웃음소리가 어색하지 않게 섞여 있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공간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이곳 주민센터는 행정 공간이라기보다, 서툰 존재들이 머물 수 있는 작은 쉼터 같았다.
희수는 멍하니, 긴 복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때, 기억과 기억 사이 비어 있던 장면이 스쳤다.
소꿉놀이 장난감에 손끝을 스치자 슬며시 쌓여있던 먼지가 묻어났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래도록 배어 있던, 그 겨울 청심동의 기억이 한 겹 한 겹,
천천히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