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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에이드 Dec 20. 2023

눈 오는 날

오늘 출근은 안녕한가요


아침에 주방을 가볍게 둘러보고 ‘성탄 잔잔한 캐럴 오르골’을 유튜브에서 찾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캐럴을 듣게 되는데 빠른 비트는 오히려 정신이 사나워져 끄게 되더라. 오르골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청량한 소리가 잔잔히 정신을 깨우는 것이 맘에 딱 들었다. ‘역시 성탄은 종소리야’ 아침은 간단히 어제 만들어 놓은 그릭 요거트를 꺼내 먹으려 한다. 유청을 분리한 그릭 요거트를 초코파우더, 꿀, 사과등 간단한 토핑과 함께 먹는 거다. 부족하다 싶으면 식빵을 굽는 것이고. 좋았어. 애들 식탁을 차려 놓고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려 한다. 화장하며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에 자동차 상태를 확인한다. '눈이 꽤 왔구나.' 눈 오는 날은 한껏 긴장이 된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눈이 내렸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나에게도 한때는 눈이 낭만 그 자체였던 적이 있다. 첫눈이 오면 보고 싶은 사람,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전화하면서 “눈이 와. 어디야?” 설레했었다. 첫눈 오는 날 만나는 사람들은 자주 보는 동네 사람들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눈을 맞으며 깔깔거리며 웃고 수다 떨었던 그 겨울이 그렇게 따뜻하고 환했었다. 그 겨울에 갔던 취리히에서는 길이 파 묻힐 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 차를 몰고 눈 길을 헤치며 간 작은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추운 몸을 녹여주던 교회와 예배당에서 예쁘게 빛나던 불빛 조명들, 수다스럽게 얘기하시는 교회 여집사님들의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들. 모든 것들의 시작은 낭만적으로 쌓인 눈이었다. 그때의 나는 ‘눈은 누가 치우지?’,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차 시동은 잘 걸릴까?’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문득 작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작년에 내가 사는 이 작은 마을엔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많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가 아닌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내리는 눈은 위험 그 자체이다. 큰 도로는 아침 일찍 제설작업이 시작되지만 좁은 길은 꽁꽁 얼어서 차가 지나가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다 미끄러지는 거 아니야.’ 경사가 있는 길을 지날 때면 차가 뒤로 밀릴까 봐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으며 초저속 운행을 해야만 한다. 이러니 자연스레 눈 오는 날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운전을 할 수 있는 자동차 상태가 된다는 것은 다행이다. 출근하려는데 차가 얼어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경우도 빈번했다. 추위로 인한 기온 변화로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아침마다 자동차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고 기다려서 늦게 출근하게 된 것이 몇 번인지 모르겠다. 겨울이 되면 서비스센터 차들이 왜 그렇게 많이 보였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방전된 차들을 깨우려 아침마다 얼마나 바쁘게 다니는지... 한 번은 배터리 방전되어 전화를 했더니 서비스센터 직원이 옆집 차를 봐주시고 계셨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눈을 보면 나는 저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일단 시동이 걸리는 것이 중요하다. 출근 시간을 넉넉히 앞두고 겉옷을 입고 나가 시동을 걸어본다. 시동이 걸렸다. “휴, 다행이다” 시동을 걸어놓고 자동차 앞 유리 성에를 제거한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사용할 때는 몰랐는데 실외 주차장에서 오롯이 눈과 추위를 감당하는 차를 보니 세상에 감사할 거 천지였다. 차를 녹이면서 주변의 눈을 쓸었다. 힘들지만 쓸어두면 내 차도 안전하고 누군가도 안전하게 다니겠지 싶다. 오직 그들을 위해서 하지는 못해도 나의 행동이 누군가의 안전을 병행하니 평소에 하지 못한 착한 일을 한듯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다 시동이 잘 걸려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좁고 위험한 길들을 조심히 빠져나와 큰 도로까지 나오니 안심이 되었다. 15분 이내에 도착하는 간단한 길인데도 긴장하다 보니 꽤 긴 거리처럼 느껴졌다. “자기야, 출근 잘했어? 길은 괜찮았어?” “나는 괜찮았어. 출근하느라 고생했어. 하루 잘 보내고 있다 봐” 뭔가 애틋한 생존신고를 뒤로 하고 일상이 별일 아닌 것처럼 흘러간다. 밖을 보니 오후의 겨울 햇살에 눈이 녹기 시작한다. '길이 다니기 좋아지겠네.' 아. 이런 생각하고 있는 게 서글프다. 눈이 언제 적 낭만이었던가. 내 낭만 돌려주시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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