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론적 세계관 몸으로 배우기
김영식 님의 <탁마(토론)에 대하여>에 대해 지난달에 보기는 했지만, 제 생각은 남기지 않았는데 '경청'과 '협상'이라는 맥락으로 글 쓰기를 시도합니다.
인상적인 구절을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 나는 즉각적으로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 모든 주장은 당사자의 주관에서 다 옳은 것이므로 주관적 주장에 대하여 시비를 가릴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이해를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일반화하여 주장하거나, 타인의 다름을 오류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행위는 공격적인 자기 잘난 척이다. 수행에서 탁마(토론)는 타인의 주장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궁금하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오류로 여겨지는 부분을 묻고 답하면 된다.
제 머릿속에서 윗글을 받아들일 때 작동하는 배경 지식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옳다>입니다. <당신이 옳다>는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고 날리는 비수와 같은 '충조평판'을 극복하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김영식 님의 <탁마(토론)에 대하여>는 그중에서 토론에 대해서만 간결한 글로 설명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들은 다시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수행에서 탁마(토론)는 타인의 주장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궁금하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오류로 여겨지는 부분을 묻고 답하면 된다.
그래서, 수행과 토론을 두고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을 실천했습니다.
수행은 낯선 개념이지만, 다행히 경청의 어려움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당신이 옳다>를 만나서 익힌 과정은 수행(修行)과 질감이 비슷한 듯합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도 드러난 양상은 저에게도 너무나 익숙합니다.
물으려는 의도는 없이 상대의 주장에 대하여 비판적인(비난의) 예단을 던지는 것은 불필요하고 공허한 소음의 메아리일 뿐이다.
개인적인 일로 제 자신이 경청이 어렵다는 사실을 2014년 즈음에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경청'에 대해 나름 마음에 담아두고 노력을 해 왔는데,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 다수가 경청이 안 되는 일은 흔히 겪습니다.
최근에 경청(傾聽)을 강조하는 삽화를 찾았습니다. 좌측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과 그림으로 추정되는데, 물리적 높이와 지위를 연결한 듯한 영감 넘치는 그림인데, 문제와 너무 가까워지면 구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더불어 최근 큰 아이가 '정말 물고기은 물을 보지 못하냐?'라고 물을 때, 이 그림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충조평판을 벽돌의 질감에 대응시키고, 스펀지를 경청에 대응시키는 그림으로 느꼈습니다.
이제 마지막인 협상입니다. 토론을 다룬 <탁마(토론)에 대하여>를 협상과 연결해 본 의도는 토론의 전제 조건이 (수행을 통해) 경청하는 것이고, 바로 그 경청을 해야만 상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며 여기까지 와 보니 이제 세 가지 다른 개념의 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