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최봉영 선생님의 페북 글《한국의 지식인과 얼치기 낱말》중에서 '5. 지식인과 낱말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다발말[1] 중에서 지난 글에 푼 내용 이후의 다발말에 대해 묻고 따져서 풀어 보는 글입니다.
다음 다발말은 그야말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내용입니다.
07.
한국에서 지식인은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에서 앞서는 것을 넘어서 지성에서 앞서고자 한다. 그들은 지식인의 구실이 남을 앞서서 남을 이끌어가는 것에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남보다 앞서서 남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고 쓰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 그들은 남보다 앞서는 지식을 갖고 쓰기 위해서 주로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지식을 가져다가 소개하거나 선전하거나 강매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그렇기에 첫인상이라고 해야 할 느낌은 강한 부정이 강조된 느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은 동의하게 됩니다.
08.
한국의 지식인이 밖에서 지식을 가져다가 소개하고, 선전하고, 강매하는 것은 거의 모두 갖가지 낱말을 들여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그들은 중국에서 갖가지 한자 낱말, 서양에서 갖가지 서양 낱말을 들여와서 사람들에게 새롭고 뛰어난 지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퍼뜨리는 일에 앞장을 서왔다. 그들은 낱말을 퍼뜨리는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지식인으로서 권위와 권력 또한 함께 커진다.
군대에서 작계를 읽고 또 군대 시스템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독립 국가인가 의심했던 일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일본의 지위가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 양 행동하는 현재 대통령의 언행도 떠오릅니다. 반면에 저의 생업인 소프트웨어 기술과 산업 환경을 보면, 우리는 도입하는 일에 그친다는 점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계속 선생님의 글을 살펴봅니다.
한국의 지식인이 사람들에게 밖에서 들여온 낱말을 퍼뜨리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음 다발말은 그 내용보다 '새기다'라는 말에 대해 제가 잘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남의 나라에서 쓰는 낱말을 낱낱으로 가져다가 뜻을 새겨서 풀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중국과 영국에서 ‘學’, ‘敎’, ‘育’, ‘learn’, ‘teach’, ‘rear’와 같은 것을 낱낱으로 가져다가 ‘學’과 ‘learn’을 ‘배우다’로, ‘敎’와 ‘teach’를 ‘가르치다’로, ‘育’과 ‘rear’를 ‘기르다’로 새겨서 풀어낸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제가 알고 있는 '새기다'는 1로, 위에서 쓰인 '새기다'는 2로 풀이합니다.
「2」 【…을 …으로】 다른 나라의 말이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옮기다.
(요즘 제가 하고 있는) 번역이 바로 '새기는 일'에 해당하네요.
두 번째 방식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남의 나라에서 쓰는 낱말을 통째로 가져다가 낱으로 쪼개어서 뜻을 풀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敎育’과 ‘結實’이라는 낱말을 통째로 가져다 쓰면서 그것을 낱으로 쪼개어서 ‘敎育’을 ‘가르쳐 기르는 일’로, ‘結實’을 ‘열매를 맺는 일’로 뜻을 풀어낸다. 한자 낱말의 경우에 거의 모두 이렇게 한다.
하지만, 설명을 읽어 보면 알고 있던 일입니다. 도리어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다음 다발말에서 '사람'이 나오자 사무쳤던 과거의 기억들이 찾아옵니다.
10.
한국의 지식인은 들여온 낱말을 퍼뜨릴 때, 낱말의 뜻을 얼치기로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그들은 ‘사람’이라는 터박이 바탕 낱말이 가진 알맹이, 곧 ‘사람 = 살아가는 것들 가운데 스스로 살려서 살아가는 일을 하는 것’을 빼버리고 ‘사람’이라는 껍데기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중국말과 영국말 따위에서 가져온 ’人’, ‘人間’, ‘人性’, ‘人格’, ‘人間性’, ‘人間味’, ‘man’, ‘human’, ‘humanity’와 같은 것으로 알맹이를 채워서 ‘사람’이라는 낱말을 완전히 얼치기 낱말로 만들어버린다.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을 비롯해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의 풀이들을 보며 놀라웠던 기억들이 그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놀라움이었고, 그다음에는 학교 교육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인데, 당시에도 충분히 반성하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던 듯합니다. 이제는 분노보다는 반성과 행동에 무게를 두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반갑다’라는 터박이 바탕 낱말이 가진 알맹이, 곧 ‘반갑다= 나와 네가 하나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너는 나의 반쪽인 것’을 빼버리고 ‘반갑다’라는 껍데기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영국말에서 가져온 ‘nice to meet you’로 알맹이를 ‘반갑다’라는 낱말을 완전히 얼치기 낱말로 만들어버린다.
제가 딱 그렇습니다. 물론, 저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나 지성인이라고 여겨오지 않았지만, 여하튼 지식 노동을 하는 사람이니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일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권위와 권력을 갖는 것이 이런 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위 다발말을 읽고 반박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 외면(外面) 하지 않고 직면(直面)한다는 사실입니다. :)
솔직히 한국의 지식인이 어떠한지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11.
한국의 지식인은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낱말이 가진 쓰임새와 쓰임뜻을 알아보는 것에서 끝을 보려고 한다. 그들은 낱말의 바탕치와 바탕뜻, 짜임새와 짜임뜻, 펼침새와 펼침뜻에는 아예 마음을 두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은 ‘개념 없는 지식인’, ‘개념이 빈약한 지식인’이 되고 만다.
중요한 사실은 제가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는커녕 거의 묻고 따지지 않았다는 점이고, 지금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우와, 드디어 마지막 다발말이네요.
12,
한국의 지식인은 낱말의 뜻에 매우 어두워서 머릿속에 얼치기 낱말들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식 세계를 이끌어가는 권위를 오로지 하려고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이 지식 권력의 꼭대기에 자리해서 학문과 교육,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방향과 내용을 멋대로 주무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위에서 끊임없이 쏟아내는 얼치기 낱말들과 밑에서 그것을 따라가는 수많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얼치기 낱말의 천국이면서 얼치기 낱말의 난장인 곳에서 ‘개념 없는 사람’. ‘정신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 다발말에서는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책 말미에서 읽혔던 최봉영 선생님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가끔이지만 선생님을 뵐 때에도 한국의 인문학 세계를 이끌어가는 우두머리를 비판하실 때에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날 선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그 감정은 선생님의 것이고, 또한 제가 그렇게 느꼈을 뿐 실제로 그러한지 알 수 없습니다.
이 긴 묻따풀의 결과가 저에게 남겨 준 것은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정신을 차리고 터박이 바탕 낱말을 또렷하게 따져 묻기
3. 말의 바탕치, 짜임새, 쓰임새, 펼침새 따위를 살피다
6. 말과 마디말에 대하여
10. 아이와 영어책을 읽다가 영어 문장의 차림을 짚어 봄
16. 낱말은 덩어리가 아니라 인수분해 하면 또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