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말과 사람: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의 시작>에서 기록을 남긴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다섯 번째 화상 모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눈 대화 중 황호성 님이 던진 '속말'이라는 행위가 자고 일어나도 잔상으로 남아 있어 이를 풀어볼까 합니다.
저도 속말을 할 테지만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는 비슷한 목적을 가진 다른 행위를 내놓았습니다.
새벽에 글을 쓸 때 혼잣말 하기
업무 일지를 쓸 때 생각 정리
위의 두 행위는 호성 님의 마지막 포기말[1]과 본질적으로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보였습니다.
하루종일 속말 하고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자문자답, 가정&논리, 시뮬레이션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의 바탕치, 짜임새, 쓰임새, 펼침새 따위를 살피다>에서 인용한 최봉영 선생님의 표현이 절로 말을 걸었습니다.
제 생각에 호성님은 나름대로 차리는 연습이 잘 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속말이 입말로 전환하는데 많은 전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말, 맥락, 입장 간 일관성)
하지만 모두가 호성님처럼 차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예로 지난 묻따풀 강학회에서 배운 내용을 담은 최봉영 선생님의 글《한국의 지식인과 얼치기 낱말》에도 비슷한 현상이 팽배해 있음을 지적합니다.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사람과 흐릿하게 펼치는 사람이 마주하게 되면 생각을 주고받는 일이 매우 어렵다.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이들은 말속에 있는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살펴서 말을 주고받으려는 반면에 생각을 흐릿하게 펼치는 이들은 말속에 들어 있는 낱말의 뜻을 그냥 대충 짚어서 말을 주고받으려 한다. 그들은 낱말의 뜻을 알아보는 일에서부터 생각이 서로 방향을 달리한다.
마침 어제 번역하던 내용에서 만난 아래 문장도 저에게 이런 생각을 강화시켰습니다.
Kent knows what he is talking about when...
자기가 하는 말을 또렷하게 알고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저를 돌아보면 최근에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꽤 긴 시간 동안 대충 말을 했고, 때로는 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이제 와서 최봉영 선생님을 통해 배우는 것이지만 '빈 말'과 '얼치기 말'을 지우고 차려진 말을 하는 일은 스스로에게도 이롭고 공공성을 띄기도 합니다.
다만, <뇌과학으로 배우는 대화라는 작용>에서 다뤘던 내용은 말차림법의 범주를 넘어서는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호성님이 속말을 넘어서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했을 때 효과를 내기 위해 더불어 익혀야 하는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감정과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상대에 대한 배려 속에서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쓰일 때 가장 잘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부터 작년에 연재하던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시리즈를 흡수합니다. 묻따풀 2024는 작년과 달리 (평일 기준) 매일 하나씩 묻따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화상 미팅 주기에 의존하는 탓인지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연재는 그 흐름이 느립니다.
어제 문득 '리듬'이라는 것이 지속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탓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글을 쓰면서 (비유적으로) 지류를 합류시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2. 욕망: 감정, 느낌, 상태를 관찰해 말로 차려 보자
3. 공공성을 지닌 말의 바탕 그리고 지식 공동체로서의 겨레
[1]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