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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Nov 22. 2023

말과 사람: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의 시작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페이스북에서 선언한 대로 말차림법에 대해 묻고 따지기로 합니다.


스스로 묻고 따지고 더불어 함께 묻고 따지기

함께 읽기로 한 분들이 생겨서 기존에 스스로 묻고 따지던 방식에 더하여 무리를 이루어 먼저 서로의 생각을 글로 공유하고, 뒤이어 화상으로 대화하는 방식으로 묻고 따지기를 진행합니다.

이 글은 두 차례의 묻고 따지기 즉, 혼자서 묻고 따지고 나서 함께 의견을 나눈 후에 피드백을 받아 다시 스스로 정리하는 글입니다.


허구를 짓는 블록은 바로 말

1장 '말과 사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써서 무엇이든 깊고 넓게 묻고 따질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온갖 것을 깊고 넓게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사피엔스>를 읽지 않았다면 최봉영 선생님 책을 알아볼 안목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에게 충격을 주었던 표현이 등장하는 페이지를 찾아보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며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는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부족 모두 그렇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허구기 힘의 구성하는 입자에 해당하는 것이 '말'이란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살았지만 너무나도 오묘한 한국말 풀이

그 후에 8개월 즈음이 지나 만난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는 다시 한번 엄청난 지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한국말이 이런 모양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학교는 우리에게 한국말의 진정한 힘을 숨겨 왔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습니다.[1]

하지만, 그 후로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200개 정도의 글을 쓰며 묻따풀반복해 온 노력으로 이제 조금씩 눈이 뜨이고 말차림의 효용성에 대해 깨닫는 중입니다.


생각의 도량형을 만드는 말

개인적인 감회는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인용문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써서 무엇이든 깊고 넓게 묻고 따질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온갖 것을 깊고 넓게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이 주는 늧을 충분히 곱씹고 표현하기 위해 모델러로써의 오랜 습관을 활용했습니다.[2]

그림을 그리고 나니 말은 생각의 도량형이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말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서 하나만 포착한 것이라 오해의 소지도 있습니다만, 실타래처럼 얽힐 수밖에 없는 생각을 범주화하고 차려가는 데에도 단위는 필요하니까요.


말은 줏대와 잣대를 만드는 기본 단위

그림을 다시 보니 문장의 뒷부분은 포함하지 않은 결과네요. 뒷부분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에 따라 온갖 것을 깊고 넓게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은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를 기록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두 가지 생각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2장에 나오는 '늦'과 '녀김' 등의 작용에 대해 풀어 보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음 그림을 소환하고 생각을 덧붙입니다.

이렇게 그림을 바탕에 두고 글을 다시 보니 말은 도량형으로 생각을 유통할 수 있게 돕습니다. 말이 생각을 발전하게 하고, 여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변화를 가합니다. 이렇게 쌓인 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작동하는 양식을 문화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오랫동안 누적된 바탕에서 현재를 살아갈 때 말은 줏대와 잣대를 만드는 기본 단위의 의미를 지닌다 하겠습니다.


사물의 성질을 살려서 살아가는 살림살이

그리고 1장에서 제가 밑줄을 친 문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은 묻고 따지는 일을 통해서 지식과 기술을 갖게 되자, 사물이 가진 성질을 살려서 살아가는 살림살이를 하게 되었다.

마침 얼마 전에 쓴 글 <사람됨의 줏대 : 주관(主觀)>에서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인용하고 '임자가 차리는 살림살이'라고 이름 붙인 일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묻고 따지는 동료인 이형도 님은 1장을 읽고 '말은 한 사람의 우주를 규정하는 그릇이다'라는 표현으로 느낌을 표현했는데, '살림살이'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자 너무나 혼란스러운 동시에 궁금증이 생겨서 강독회에 나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한편, 최봉영 선생님이 페북에 쓴 <사람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에 달린 댓글은 '살림살이'를 표현하는 멋진 문장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주석

[1] 분서갱유 등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고,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 체제의 친일파가 깊이 침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연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2] 더불어 박문호 박사님의 학습 노하우 영상에서 배운 내용이 영향을 끼친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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