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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Dec 05. 2023

욕망: 감정, 느낌, 상태를 관찰해 말로 차려 보자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세 번째 말차림법 묻따풀 화상 만남에서 번외의 주제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 두려고 순서(?)를 파괴하고 글을 올립니다.


욕망과 욕심은 나쁜 것인가?

욕망이란 단어를 끄집어내어 푸는 일은 모두 낯설어했습니다. 2년 전에 최봉영 선생님 글을 접하고 욕망 탐구 시리즈를 쓸 때 저 역시 그랬으니까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도반들의 말을 듣다가 의외라고 생각한 부분은 영모님 발언이었습니다.


어떤 계기인지 모르지만,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 직원인 그에게 '리더가 되기 위해 자기 욕구는 알아야 한다'는 주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꽤 노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던 영모님의 3년 정도 지난 지금에 최봉영 선생님의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에서 '욕심'에 대한 정의를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설명이 재밌게 이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욕심'이라고 하면 놀부를 연상시키는 따위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정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에서 정의한 욕심

영모님이 말한 구절을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65~71쪽까지 6쪽에 걸쳐 <욕심과 다스림>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중 인상 깊은 내용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욕심을 바탕으로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것들을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부대끼고, 들볶이고, 휘둘리는 상태를 넘어서 스스로 뜻을 펼치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전에 읽었었나 싶게 생소합니다. 또한, 놀라운 점은 뒤에 소개할 '내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이라는 문구의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영모님 말대로 사회에서 배운 욕심의 느낌과는 너무 결이 다릅니다.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욕심은 나의 안에 자리하고 있는 '하고자 하는 마음', '하고 싶은 마음'을 말하며, 대상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다루고자 하는 뜻으로 드러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대상에 대한 욕심을 이루어 가는 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박문호 박사님이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학습 효율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던 말씀과도 맥이 닿습니다.

마지막 한 구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대상에서 느끼는 맛을 갖거나 버리는 과정, 곧 욕심을 채우는 일을 통해서 스스로 임자로서 구실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욕심을 채우는 일을 통해서 임자로서 구실하는 맛을 알게 됨을 말한다.

임자가 되기 위해서 욕심을 채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어른이 되기 위해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욕심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란 점입니다.


줏대를 펼쳐서 누리는 힘 : 권리(權利)

2021년 9월 아래 그림을 보고 글을 쓴 후로는 마음에 품고 오랫동안 떠올리고 인용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욕망이란 것이 제가 세뇌된 녀김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임자, 줏대, 잣대 따위가 어렴풋하게나마 녀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종합적인 제 생각은 아마도 <줏대를 펼쳐서 누리는 힘 : 권리(權利)>에 드러나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우리를 지배하기도 하는 문명에서 내 인생에 개입하기

영모님의 위트로 웃고 난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을 때 페북에서 두 개의 흥미로운 이미지[1]를 발견했습니다.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제 머릿속에서 결합되었습니다.

출애굽기(탈출기)의 배경이 된 시절이나 요즘이나 사람들이 부림을 당하는 일은 여전하다는 말을 기독교 배경이 있는 분들에게 자주 말한 바 있는데, 왼쪽 그림을 이를 더 잘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른쪽은 내 인생에 '개입'한다는 묘한 표현을 씁니다. 내가 사는 인생인데 개입한다는 표현을 써야 할까요? 저는 멋진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인용한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말과 문명 세계와 자연 세계)에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개념은 문화유산으로 우리가 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지배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풀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자

<내가 풀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자>의 바탕이 된 2014년의 깨우침이 있습니다. <대체 뭐가 문제야>를 제 인생책으로 만들어 준 경험이고,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의 저를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작정 열심히 해서 꼭 결과를 내고 말겠다는 모호한 생각이 지치고 소모되는 삶을 만들었던 시간에 결국 10년이란 시간을 두고 저를 여기에 데려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실수가 섞여서 2015년 명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명리학이 사주를 다루는 것인지도 모른 채 채로 수업을 다 듣고 마지막 시간에 제 사주를 볼 때까지 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대운이라는 것을 보는데, 제가 앞으로 10년간 큰 배움의 기운 아래 놓인다고 사주는 말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의심을 거두고 사주를 그냥 믿기로 했는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실제로 그렇게 된 듯합니다.


주석

[1] 왼쪽 그림은 허진혁 님의 포스트, 오른쪽 이미지는 장홍석 님의 포스트에서 발견했습니다.


지난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연재

1. 말과 사람: 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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