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
지난 글에서는 '도가도 비상도'를 떠올렸는데, 다음 포기말[1]은 '명가명 비상명'을 떠올립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오는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같은 뜻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회'라고 부를 때 찾고자 하는 그것의 본질에 대한 풀이란 점에서 기억 속의 문구가 책을 읽는데 말을 걸어온 것이죠.
다음 포기말들을 보니 절로 제 약한 부분을 반성했습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며 곱씹어 보니 배우고 싶어 졌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이 '일구이무一球二無'를 닮게 살고 싶었습니다.
사인할 때 꼭 쓰는 나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도 그러한 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일구이무란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는 뜻이지만, 이는 곧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닮고 싶은 마음에서 배워 본성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페벗님이 전해주신 메시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글을 찾아 옮깁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울리는 것은 좋으나 이를 넘어서 줏대 없이 따라 하는 일도 주의하자 싶어 화이부동(和而不同) 이미지도 찾아 옮겨 봅니다.
다음 포기말들에 '운'이란 말이 나오니 <새로운 운칠기삼(運七技三) 활용법>에서 했던 말들이 또 말을 겁니다.
내가 이번에 최강야구 감독을 맡게 된 걸 보며 누군가는 저 사람은 참 운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승엽이 두산 감독으로 선임된 시점에 딱 일본에서 코치를 그만뒀으니, 타이밍이 어떻게 그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물론 운이 좋은 것도 맞다.
운을 주로 보는 이들에게 야신이 말합니다.
김성근은 여전히 건강하고 야구를 할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인식이 있으니 내게 감독을 맡긴 것이다. <중략> 내 인생에 찾아온 기회에는 그런 준비된 순간들이 어마 어마하게 많았다.
'일구이무一球二無'의 의식에 따르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어야 하는 법이죠.
기회를 잡은 사람은 모든 준비가 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일들을 알려줍니다.
도장 찍기나 서류 복사 말고는 할 일이 없어도 매일 출근하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김성근한테는 무슨 일을 시켜도 해낸다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이창현 씨의 눈에 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만약 그때 내가 처지를 비관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은행에 있을 수는 없다며 당장 그만뒀더라면 마산상고 감독이라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독자들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지금 당장 즐겁든 슬프든, 자신이 그 속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운 탓, 남 탓만 하며 비관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자기가 지금 베스트라는 확신이 들 만큼 열심히 하면 기회는 언젠가 오게 되어 있다.
지난 글을 쓰며 '일구이무一球二無'라는 의식을 새로운 운칠기삼(運七技三) 활용법이라고 명명한 제 의도와 그대로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처음 읽은 스무 쪽의 마지막 부분 내용들은 '의식'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29쪽의 부제는 '잠재 능력을 깨우는 의식의 힘'이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야신은 '그저 편하고자 한다면 죽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쓰셨습니다.
강한 어투라 반발심이 날 수도 있고, '그럼 어떻게'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개든 1000개든 아무렇지 않게 평고를 쳐주고 배팅 연습을 해준다. 선수들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면 그저 이 순간이 좋다. <중략> 힘이 든다거나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못 하겠다는 의식은 전혀 없다. 사실 그런 의식이 끼어들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늙는다. 아까까지는 잘 되던 것이,
야신은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 의식'이라는 말을 볼 때 <테니스 이너 게임>의 읽으며 공감했던 순간들이 스쳐갑니다. 그런데 어떤 말들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아 이미지만 찾아 이렇게 보관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말을 건 말들과 지금처럼 대화하듯 글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때는 북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가르친 선수들 중에는 자기 한계를 뛰어넘은 케이스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처음에는 '와, 이걸 어떻게 하지' 싶어 난감했던 선수들도 하루 종일 연습을 하고, 문제에 부딪히면 아이디어를 찾아나가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중략> 그랬던 선수들이 훈련 끝에 버젓이 SK 외야의 주축이 되었으니, 한계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다음 문장을 읽자 <울트라러닝> 독서 경험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생을 마칠 때 자기가 가진 잠재 능력을 100% 발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작 자기 능력의 20~30% 정도나 발휘하며 살까? 그러니 인간에겐 한계가 없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70~80%의 능력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바로 스스로가 설정한 한계 속에서 사라진다.
<울트라러닝>을 읽었을 때 야신의 믿음과 같은 그리니까, '인간은 한계가 없다'는 말을 스스로 느껴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의 기억에 이렇게 말을 걸었죠.
그래, 바로 그런 이유로 2024년에 울트라러닝 프로젝트를 하기로 한 거잖아?
한편, <스피노자 대신에 김성근 감독님>편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스피노자에 비유하게 했던 포기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 책에서 바로 다음 부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니 사로잡히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스무 쪽 남짓 읽은 내용에 영향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연초 연휴 동안 이렇게 다섯 편의 글을 내리 쓰게 되었습니다. 쓰고 보니 '말이 말을 걸어 글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에 넣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삶을 차리다 보니 제가 쓴 글도 차려 가는 양상이 드러난 듯합니다. 경계가 모호한 상태를 만든다는 뜻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지금은 모호한 대로 그대로 두기로 하고, <인생은 순간이다>의 다음 내용에 대한 제 생각은 아마도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에 뒤이어 갈 듯합니다. 독자님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왜 포기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