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말차림법 묻따풀
지난 글에 이어 <한국말 말차림법> 2장 '말과 녀김'을 함께 읽고 묻고 따져 풀어 본 기록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더불어 함께'는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말은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불어 함께 하는 말을 바탕으로 커다랗게 무리를 지어서 어울려 살아간다.
작년 1월 <그위란 무엇인가?>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꽤 어설펐지만, 그때의 행동이 씨앗이 되어 지금 여기 그때보다 조금 나은 상태로 묻따풀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보다 막막함이 줄고 깨우침의 즐거움이 조금 늘었습니다.
간단히 말은 '공공의 것'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말을 공유하는 집단을 부르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함께 하는 이들을 겨레라고 부른다. <중략> 말을 바탕으로 온갖 생각을 주고받으며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최봉영 선생님의 풀이와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는 다릅니다.
「1」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불일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학자가 아니기에 엄밀함보다는 실용적으로 선택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핏줄로 묶는 것이 효용성이 클까요? 언어로 묶는 것이 효용이 클까요? 효용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사실 즉각적으로 선택을 했지만 무어라 표현할지 고민하던 차에 우연하게 HBR에서 존경하는 피터 드러커의 기사에 근거(?)가 있었습니다.
지식사회에서 지식은 개인과 경제 전체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경제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생산의 요소로 꼽는 땅, 노동, 자본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그런 것들은 전문지식만 있다면 아주 쉽게 획득할 수 있다. 동시에 전문지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전문지식은 과업에 접목됐을 때만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식사회가 조직들의 사회Society of Organizations가 된 이유다.
지식은 언어를 원소로 합니다. 드러커에 따르면 지식은 생산성의 원천으로 강력한 경제적인 힘을 발휘합니다.[1] 반면에 핏줄은 어떤가요? '핏줄' 단위의 구분은 과거에는 사회의 안정성에 기여했겠지만, 교통과 통신수단을 발달로 지식 기반의 교류가 넘쳐나는 변화 속에서 '인격 차별'에 활용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앞서 소개한 드러커의 기사에도 마침 비슷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사회, 공동체, 가족은 모두 보수적인 집단이다. 안정을 유지하고 변화를 막거나 적어도 늦추려고 한다. 현대의 조직은 불안정을 일으킨다. 이들은 혁신을 위해 조직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말이다.
경제적 관점에 한정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진화적 관점에서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조직은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갑니다. 미래는 그러한 조직이 만들어간다 할 수 있고, 드러커가 말하는 조직은 유사 겨레라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용으로 제가 주장하는 바가 모호해진 듯합니다. 겨레가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을 뜻한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핏줄을 이어받는 민족을 겨레라고 볼 것인가? 이에 대해 정답을 구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겨레'란 말을 무엇이라 믿을 것이며, 그렇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는 핏줄은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이미 실효성이 없고) 가족 수준으로 의미가 좁혀져 있어 언어를 함께 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써야 '겨레'란 단어를 쓰게 될 듯하여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협업을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BoundedContext는 마치 겨레 혹은 드러커가 말하는 조직의 원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소 비약이 있더라도 생각을 펼쳐 보았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말을 좇아서 따르지 않으면 말은 바탕을 잃게 되어 어떤 구실도 하지 못하게 된다. <맥락>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은 공공성이 비롯하는 기틀이 된다. 사람은 말의 공공성에 기대어서 지식, 정보, 기술, 지혜와 같은 것을 함께 일구고 가꾸는 일을 이어갈 수 있다.
위 그림은 협업의 맥락을 보여준다면 언어의 작용에 초점을 맞춘 표현은 <사람은 어떻게 말이 뜻을 갖게 만드는가?(下)>에서 그린 그림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앞서 <그위란 무엇인가?>에서 드러난 대로 작년부터 따지고 위와 같이 그림을 그려본 활동이 없었다면 '말의 공공성'은 여전히 저에게 막연한 남의 말로 남아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최봉영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묻따풀의 가치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1] 비단 경제적인 힘만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핏줄과 언어 중에 선택하기 위해 논의의 폭을 좁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