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3
이 글은 최봉영 선생님이 지난 글에 이어서 지난 11월 25일 페북에 쓰신 글의 후반부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묻고 따져 풀어 본 기록입니다.
뜻을 풀이하다 보면 더 복잡한 관계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06.
한국말은 “무엇은 어떤 것이다”에서 ‘무엇’과 ‘어떤 것’이 서로 뜻을 기대는 관계를 넘어서 뜻의 바탕을 같이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많다. 이를테면 “파래는 빛깔이 파란 것이다.”나 “쓸개는 맛이 쓴 것이다.”와 같은 말에서 ‘파래’와 ‘빛깔이 파란 것’이나 '쓸개'와 '맛이 쓴 것'은 서로 뜻을 기대는 관계를 넘어서 뜻의 바탕을 같이 하는 관계로 나아가 있다.
복잡하게 그려 온 그림을 다른 차원으로 표현할 때가 된 듯합니다.
막연했는데, 다행히 뒤이어 예시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파래’나 ‘쓸개’에서 비롯하는 느낌을 가지고서 ‘빛깔이 파란 것’과 ‘맛이 쓴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렷이 알아볼 수 있다. 이때 ‘파래’나 ‘쓸개’는 뜻이 비롯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빛깔이 파란 것’과 ‘맛이 쓴 것’은 뜻이 드러나서 이루어지는 어떤 꼴을 가리킨다. ‘파래’와 ‘빛깔이 파란 것’, ‘쓸개’와 ‘맛이 쓴 것’은 서로 뜻을 기대는 관계를 넘어서 뜻이 비롯하는 바탕을 같이 하는 관계로 나아가 있다.
앞서 그린 그림의 일부를 재사용할 수 있어서 또 축적이 일어납니다.
늘 쓰던 말을 두고 두 개의 말을 하나로 아우른다고 표현하니 다소 긴장을 하게 됩니다. :)
07.
“파래는 빛깔이 파란 것이다.”라는 말은 두 개의 말을 하나로 아우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파래이다.”와 “이것은 빛깔이 파랗다.”를 하나로 아울러서 “파래는 빛깔이 파랗다.”라고 말한다. 이때 사람들이 ‘파래’라는 것을 ‘빛깔이 파랗다’라는 말의 뜻이 비롯하는 바탕으로 삼게 되면. ‘파래’와 ‘빛깔이 파랗다’는 뜻의 바탕을 같이 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파라-’라는 말소리를 같이 함으로써, ‘파래’와 ‘빛깔이 파랗다’가 뜻의 바탕을 같이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긴장을 누르며 선생님의 문장을 읽어 보니 제가 자주 쓰던 'Multi-layered' 즉, 다층적인 말을 병합하는 일이 아우르는 것이군요. 앞으로는 습관적으로 'Multi-layered'가 떠오르면 다층이나 다차원을 아우르기라는 표현을 써봐야겠습니다.
다음 절을 읽을 때는 '소리를 통해서 뜻의 바탕을 같이 하듯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08.
한국말에서 ‘파래’와 ‘빛깔이 파랗다’가 ‘파라-’라는 소리를 통해서 뜻의 바탕을 같이 하듯이 ‘물’과 ‘물다’는 ‘물-’이라는 소리를 통해서 뜻의 바탕을 같이 한다. 한국말에서 ‘물’은 ‘무엇을 무는 것’을 뜻하는 말로써, 무엇이 안에 들어오면 언제나 늘 ‘무는 일’을 한다. 밑이 좁은 배가 일렁이는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은 물이 배를 빈틈없이 물어주기 때문이다. 한국사람은 ‘물’에서 볼 수 있는 ‘무는 일’을 가지고서 ‘물’과 ‘물다’라는 말이 뜻의 바탕을 같이하는 말로 만들어서 써왔다. 사람들은 ‘물’을 통해서 ‘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또렷이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말차림법> 3장에서 읽은 입말에 대한 설명이 떠오릅니다. 물과 무는 일이 바탕을 같이한다는 사실은 강독회에 참여했을 때 최봉영 선생님께 직접 들었는데,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연관성이라 놀랐습니다. 더불어 '묻고 따질 때'의 무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힌트를 주는 듯도 합니다.
잣대를 이용해 뜻을 살려갑니다.
사람들은 ‘물’이라는 잣대를 세워서 ‘물다’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일인지 또렷이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무르다', '물렁하다', '무겁다', '무섭다', '무게', '무서움', '무서리', '무지개'와 같은 말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다음 절을 보자 기억 속에 강인하게 담겨 있는 <기억 용량을 주여주는 대칭화>가 떠오릅니다.
09.
한국말에는 “물은 무는 것이다.”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불은 부는(불어나게 하는) 것이다.”, “해는 하는(하게 하는) 것이다.”, “달은 다는(달게 하는) 것이다.”, “땅은 닿는(닿게 하는) 것이다.”, “돌은 도는(돌게 하는) 것이다.”, “얼음은 언(얼이게 된) 것이다.”, “몸은 모인(모여서 된) 것이다.”, “신은 신는(발에 신는) 것이다.”, “짐은 지는(등에 지는) 것이다.”, “돈은 도는(돌게 하는) 것이다.”, “가람은 가르는(갈라 가는) 것이다.”, “말은 마는(말게 하는) 것이다.”와 같은 것이 거듭해서 이어질 수 있다.
한국말이 과학을 바탕에 두었을 리야 없지만, 조상들의 슬기가 대칭화를 품었다는 생각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
한국말에 “파래는 빛깔이 파란 것이다.”나 “물은 무엇을 무는 것이다.”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우연히 그냥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 힘써 이루어놓은 일이다. 사람들은 말의 뜻을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의 뜻이 비롯하는 바탕을 또렷하게 차리고자 했다. 한국사람은 머릿속에 이와 같은 말차림법을 갖고서 끊임없이 말을 갈고닦아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국말을 가볍게 녀기기 때문에 머릿속에 그러한 것이 차려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매우 딱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들 이름을 세종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만큼 말차림법에 대해서 뚜벅뚜벅 갖춰가게 하는 말씀이 마지막에 이어집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죠.
4. 두 가지 온인 나 그리고 쪽인 나로 살필 여섯 가지
10.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
11. 한국말은 어떻게 나눠지는가?
13. 한국말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14.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
15. 한국사람에게 나 그리고 인간(人间)은 무엇인가?
24. 사람됨의 줏대 : 주관(主觀)
29. 인격을 존중하거나 무시하는 일
32.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36. 사람이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