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3 -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
지난 글을 배경 지식 삼아서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대한 학습과 소화한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한 번에 끝낼 수는 없을 듯하여 어떻게 시작할지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묻따풀 학당 오프라인 모임 강의 이후에 최봉영 선생님이 다시 정리해서 공유해 주신 도식으로 공부하는 틀을 잡아 보려고 합니다. 욕망하는 임자 도식이 등장합니다. 2년 전에 공부했던 <욕망을 둘러싼 세계>가 배경 지식이 되었습니다.
배경 지식이 부족한 독자님들은 링크를 타고 가서 관련 글을 읽으실 수도 있지만, 인간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그걸 명료하게 인지하면 '임자'가 된다는 사실만 아셔도 됩니다.
다시 도식을 보면 욕망하는 임자는 욕망의 임자로서 '위함'과 '꾀함'을 실행합니다. 이 실행이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최봉영 선생님과 통화로 배운 내용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쪽인 나를 세우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편에 두 가지 사고방식을 다룬 최봉영 선생님의 행위자 이론 기록이 있습니다.[1]
앞서 도식으로 본 욕망하는 임자의 위하고 꾀함을 온인 나의 사고방식을 덧붙인 도식이 아래 내용입니다. 도식을 보면서 감탄한 부분이 있습니다. 온인 <나>가 자유를 가름하는 잣대라는 표현입니다.
필자는 청소년시절부터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했고, 당시 주로 쓰이던 표현을 따라 스스로 '개인주의자'라 인식해 왔습니다. 그런데 진영을 나누는 듯한 어감을 주는 개인주의보다는 '온인 나'라는 인식으로 스스로 '자유를 가름하는 잣대'로 쓰는 편이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든다'는 느낌은 도식의 이후 가지에서 효용성으로 증명(?)이 됩니다. 꾀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면 욕망에 충실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꾀하고 싶지만 마음대로(내 맛대로/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존재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상태도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 것과 다른 것이 나를 막아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배움의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 필자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 있어 이를 기록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상태'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도식에서 위 부분을 보니 확실히 사회 초년 시절 저에게 동력이 되었던 것이 바로 사회 통념과 업계 현실이 억압한 자유를 회복하려는 듯이 노력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서 최 선생님의 도식 소화를 마치겠습니다. 공동체 의식 하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쪽인 나’ 도식을 잘 보면 '온인 나'에서 '내 맛대로/내 멋대로'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제대로'가 있습니다. '제대로'는 어떤 의미일까 보았더니 바로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구실을 좇아서 하는' 것입니다.
와우.. 바로 떠오르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빠르게 재구성하는 힘인 loose-coupled입니다. loosely-coupled는 쪽인 나로 더 큰 전체를 이루는 원리를 담은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 여기에 쓰인 배경 지식은 작년에 필자가 연재했던 묻따풀 훈련 16편과 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법 6편에 담겨 있습니다.
사족일 수도 있는데, 최근 푹 빠져서 읽고 있는 김상욱 교수님의 <떨림과 울림> 97쪽 다음 내용이 '온인 나와 쪽인 나'라는 이분법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물리학에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거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굳이 대응시켜 보면 '인과관계'가 강조된 전자가 '온인 나' 시각에 가깝고,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은 '온인 나' 시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