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3 -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
지난 두 개의 글을 쓰며 갖춘 배경 지식을 토대로
드디어 최봉영 선생님께서 페이스북으로 공유해 주신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분들도 아마 '마냥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라는 문장에 동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은 “나는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려면 말을 가지고서 생각을 펼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나는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마냥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저 역시 최근에 <메타인지와 귀를 열기 그리고 자기 객관화>라는 제목의 글을 썼기에 최봉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고, 쉽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습니다.
마치 삼단논법 마냥 단계적으로 이해해 나가는 형식이 마음에 듭니다.
사람이 “나는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하려면, 먼저 “나는 살아간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나는 나로서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끝으로 “나는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을 한다는 말은 보자마자 '사람'의 정의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사람은 “나는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갖기에 앞서서 저마다 살아가는 일을 한다. 사람은 어머니 배속에 아기로 자리할 때부터 줄기차게 살아가는 일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저마다 하나의 나라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주장은 처음 접합니다.
첫째로 나는 사람으로서 그냥 ~하는 일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이를테면 나는 사람으로서 해, 달, 땅, 하늘, 바다, 물, 불, 흙과 같은 것이 나와 그냥 함께 하는 갖가지 일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나는 해, 달, 땅, 하늘, 바다, 물, 불, 흙과 같은 모든 것과 그냥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보자마자 '이하'하고 동의하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러고 보니 자연은 뜻 자체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한자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두 번째도 역시 수긍이 갑니다.
둘째로 나는 사람으로서 절로 ~하는 일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이를테면 나는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절로 숨을 쉬고, 절로 눈을 깜빡이고, 절로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같은 갖가지 일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나는 절로 하는 일을 바탕으로 목숨을 붙이고 살아간다.
최봉영 선생님 가르침에 따라 과거에 쓴 글이 있어 '욕구(欲求)에 따르는 일'이구나 하고 속으로 답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 문단을 보는 순간 바로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둘째는 지각없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자율 신경계의 작동과 같은 것이구나 하고 속으로 답을 합니다.
욕구는 다음 항목에서 설명이 등장합니다.
셋째로 나는 사람으로서 늧(:刺戟)을 가지고 무엇을 어떤 것으로 느껴서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에 대한 욕구를 갖거나 이루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때 욕구는 내가 늧을 가지고 무엇을 어떤 것으로 느껴서 알게 된 것을 것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 뜻에서 무엇을 다루는데 필요한 온갖 일을 꾀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욕구를 갖거나 이루는 일을 하게 됨으로써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일을 꾀하고 이루는 임자가 된다. 사람은 물론이고 벌과 나비, 문어와 갈치, 개와 돼지, 침팬지와 고릴라와 같은 것은 늧(:刺戟)을 가지고 무엇을 어떤 것으로 느껴서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에 대한 욕구를 갖거나 이루는 일을 한다. 이들은 모두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임자로 자리해서 살아간다.
늧(:刺戟)은 월말김어준에서 박문호 박사님께 들은 '느낌'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 번째 일에 대한 설명을 보면 역시 재작년에 쓴 글 덕분에 '욕망'을 떠올리게 됩니다.
넷째로 나는 사람으로서 말(:言語)을 가지고 무엇을 어떤 것으로 녀겨서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에 대한 욕망을 갖거나 이루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때 욕망은 내가 말을 가지고 무엇을 어떤 것으로 녀겨서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에 대해서 펼쳐놓은 생각들에 기대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다루는데 필요한 온갖 일을 꾀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말로 생각을 펼쳐서 무엇을 어떤 것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되면,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욕망에 담아서 드러낼 수 있다.
더불어 최근에 글로 다룬 탓에 현실과 현실을 매핑한 시스템(프로그램)이라는 이원화된 세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또 연쇄적으로 시골 농부님께 배운 '사고 지능과 자연 지능'이라는 이원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푹 빠져서 읽고 있는 김상욱 교수님의 <떨림과 울림>의 문구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믿는 것을 본다
양자역학 지식을 다룬 장의 제목인데,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절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전자에 부딪혀 튕겨 나온 빛을 보고 알아낸 위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자는 이미 그 장소에 없다. <중략> 측정이 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측정의 부정확성이나 오차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누구도 전자에 교란을 주지 않고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중략> 전자의 파동이란 전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될 확률을 의미한다.
책 내용을 해설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글귀를 빌려 왔는데, 책에서 조금 벗어나 장 제목을 보고 떠오른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아내랑 사귈 때 아내의 지적으로 내가 놀라울 정도로 보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과학에 대한 학습은 내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다는 말을 명제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저 위의 시스템처럼 주관으로 만든 하나의 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상에 제가 살아간다고 믿는 세상이기도 하죠. 놀랍게도 이는 언젠가 최봉영 선생님이 언어로 이루어진 (머릿속) 세상을 메타버스로 설명한 일과도 그대로 들어맞는 듯합니다.
이런 생각 후에 다음 문장을 보니 이해가 쉽습니다.
사람은 욕망의 임자가 되면서 욕구의 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것들, 곧 ‘이것보다 더 맛있는 것’, ‘무엇보다 가장 맛있는 것’, ‘끝없이 이어지는 행복’, ‘하늘을 날아가는 코끼리’, ‘화성에서 날아온 골프공’,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음’ 따위를 욕망의 대상으로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루는 일을 할 수 있다.
다음 문장을 읽을 때는 <사피엔스>에서 말한 '허구'를 만들어내는 힘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람은 욕망의 임자가 되면서 물질로 드러나는 세계를 넘어선 그 위의 곳에 자리하여, 생각으로 지어낸 욕망들을 이루기 위해서 물질로서 드러나는 세계를 보고, 만지고, 짓고, 만들고, 부수고, 허물고, 바꾸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물질로서 드러나는 바깥 세계와 생각으로 지어낸 욕망 세계를 어우르고 아울러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끊임없이 이룩해 나간다.
또한, 재작년 공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창조의 기본 단위인 문장놀이'도 다시 찾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