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3 -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
지난 글에 이어 최봉영 선생님께서 페이스북으로 공유해 주신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 문단을 읽으면서 최봉영 선생님을 통해 '임자'나 '줏대와 잣대'를 알게 된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사람은 말로 생각을 펼쳐서 욕망의 임자로 자리하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하려는 뜻에서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우 또렷이 알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하는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욕망의 임자가 또렷해질수록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하는 <나>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된다.
<'줏대와 잣대'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보니 작년에 비로소 '줏대와 잣대'라는 개념에 익숙해진 듯합니다.
<차려서 사는 임자의 사는 얘기>의 작성 시기를 보니 임자에 대한 인식은 작년 초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선 단어였던 '임자'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상태와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로서 벌이는 모든 일은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줏대로 삼아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것에 맞도록 거느리고 다스린다. 이러니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다수의 지인들을 관찰할 때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가 잘못된 듯한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심지어 그런 현상을 일반화한 지인의 글도 있습니다. 지인이 '노예'라고 분류한 이들의 행동 패턴이 내가 종종 관찰하는 다수가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는 회사에서만이 아니고 사람들의 소비 행위나 투표 과정에서도 자주 봅니다.
다음 내용을 읽을 때는 필자가 소프트웨어 설계 일을 오래 해 오며 익숙해진 다층(multi-layered) 사고에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몸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오로지 하나의 <나>로 생각하기 쉽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나를 저마다 따로 하는 혼자만의 <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은 말로 생각을 펼쳐서 무엇이든 꾸며내는 임자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대한 생각 또한 여러 가지로 꾸며낼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서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대한 생각에 많은 차이가 나는 까닭이다.
다층 사고란 말이 일반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포토샵에 익숙한 분들은 개별 layer에 관심 있는 대상만 표현하고 이를 모두 합쳐서(merge) 하나의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아실 겁니다. 포토샵 이미지처럼 '내 생각'이라고 뭉뚱그려 떠올리는 생각 속에는 학습에 의해 세뇌된 통념도 있고, '쪽인 나'로 받아들이거나 강제된 생각도 있다는 점에서 이를 구분하려면 다층 사고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앞서 봤던 최봉영 선생님의 도식에서 '쪽인 나의 꾀함' 하위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바로 이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문장들은 엉키어 있는 <나>라는 인식을 해체하여 풀어볼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에 대해서 깊고 넓게 묻고 따지게 되면, <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서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해서 <내>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일찍부터 많은 이들이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를 밝게 아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앞서 다층 사고라고 표현한 말을 활용하면, 층을 나눠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 더 보편적인 설명은 제 인생 책인 <대체 뭐가 문제야>가 설명하는 따져 묻는 과정입니다. 제랄드 와인버그(<대체 뭐가 문자야> 저자)에 따르면 뭐가 문제인지 따지기 전에 누구 혹은 누구들의 문제인지부터 규명하라고 조언합니다.
그 '누구'를 인식하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는 주장이 앞서 다룬 최봉영 선생님의 행위자 이론입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로서 위하고자 하는 <나>이고, <내>가 다른 것과 함께 하는 쪽인 <나>로서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먼저 내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로서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저마다 따로 하기 때문에 저마다 나름의 맛이나 멋을 좇아서 살아간다. 이런 나는 나름의 맛이나 멋을 좇는 일에 필요한 경우에만 다른 것과 함께 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런 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오호... '온인 나' 역시 두 가지로 나뉘는군요.
첫째는 내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로서 오로지 <나>만 따로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나>의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필요에 따라서 뜻대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는 <내>가 뜻하는 것에 따라서 <내>가 갖고 싶으면 갖고, <내>가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내>가 그냥 두고 싶으면 그냥 두고자 한다. 이런 나는 <나>만 따로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 이런 나는 <내>가 하고자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잣대로 삼아서,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는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는 <내>가 뜻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의 자유를 끝없이 넓혀가려고 한다.
세상을 '나와 환경'의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프로그래밍 경험 때문에 단순하게 짠 (토이) 프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어법은 틀리겠지만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면 '나들'에 대한 설명 같습니다.
둘째는 내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로서 <나>와 같은 <우리>만 따로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우리>의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이 필요에 따라서 뜻대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는 <우리>만 함께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 이런 나는 <우리>가 뜻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가 갖고 싶으면 갖고, <우리>가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우리>가 그냥 두고 싶으면 그냥 두고자 한다. 이런 나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잣대로 삼아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는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는 <우리>가 뜻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끝없이 넓혀나가려고 한다.
찾아보니 작년에 쓴 글에서 행위자 이론 도식 중에 위 두 가지를 설명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래 문단을 읽다 보면 과거에 흔히 쓰이던 '개인주의 vs. 전체주의' 이분법도 떠오릅니다.
내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인 경우에 나는 <나>만 따로 하거나 <우리>만 따로 하고자 하는 <나>를 바탕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나는 <우리>의 범위를 좁혀서 <우리>의 알맹이를 없애버리면 오로지 <나>만 위하고자 하는 <나>로서 살아가게 되고, <우리>의 범위를 모두로 넓혀서 <남>까지 다 받아들이게 되면 <모두>를 두루 위하고자 하는 <나>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나는 내가 <우리>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일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크게 달라진다.
이제는 '쪽인 나'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모두로서 함께 하는 쪽인 <나>로서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하나의 쪽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구실을 좇아서 다른 모든 쪽과 함께 잘 어울리고자 한다. 이런 나는 네 가지 <나>, 곧 나를 위하고자 하는 <나>와 우리를 위하고자 하는 <나>와 남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와 것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잘 어울리게 만들어서 <나>를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다스려나가야 한다. 이런 나는 나의 쪽이 다른 모든 쪽과 함께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언제나 늘 걸맞고 알맞은 일을 꾀하고자 한다.
그리고 '쪽인 나'로 살펴야 할 여섯 가지 항목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다른 모든 것의 쪽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할 때, 내가 특별히 살펴야 하는 것은 크게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나만 따로 해도 되는 것, 둘째. 나만 따로 해야 하는 것, 셋째. 우리만 따로 해도 되는 것, 넷째. 우리만 따로 해야 하는 것, 다섯째. 남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것, 여섯째. 것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쪽인 나로 살아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에 대한 설명처럼 들립니다.
첫째로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나만 따로 해도 되는 <나>를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나의 쪽만 따로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는 것을 나의 뜻을 좇아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을 나의 쪽만 따로 해도 되는 경우에 나는 라면을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끓여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라면을 끓여 먹는다 하더라도 라면을 곧바로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나중에 끓여 먹을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쪽인 나로 감당할 책임감처럼 느껴집니다.
둘째로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나만 따로 해야 되는 <나>를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나의 쪽만 따로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밖에 있는 다른 것의 쪽을 끌어들여서 함께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내가 독감에 걸려서 앓는 것은 나의 쪽만 따로 해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쪽의 사람을 끌어들여서 함께 앓도록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만 잘하면 전체가 나아지는 XP>를 쓰며 배운 점수(漸修)도 해당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점수는 세 번째 항목에도 해당하니 일대일 대응으로 볼 일은 아닌 듯합니다.
셋째는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우리만 따로 해도 되는 <우리>를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우리의 쪽만 따로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 저들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는 것을 저들의 뜻을 좇아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을 저들만 따로 해도 되는 경우에 우리는 라면을 곧바로 끓여 먹을 수도 있고, 나중에 끓여 먹을 수도 있다.
항목으로 나눠진 내용을 보면 볼수록 사리분별에 대한 내용으로 여겨집니다.
넷째는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우리만 따로 해야 되는 <우리>를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우리의 쪽만 따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밖에 있는 다른 것의 쪽을 끌어들여서 함께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독감에 걸려서 앓는 것은 우리의 쪽만 따로 해야 하는 일이기에 다른 쪽의 사람을 끌어들여서 함께 앓도록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 번째도 마찬가지 느낌을 줍니다.
다섯째는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나>와 <우리>의 밖에 자리해 있는 <남>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나>나 <우리>의 밖에 자리해 있는 <남>의 쪽까지 모두 함께 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내가 식당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웃고 떠들면서 식사를 할 때,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여섯 번째는 우리의 범주를 인간 세계를 넘어선 영역까지 인식하는 사고로 보입니다.
여섯째는 내가 하나의 쪽으로서 <나>와 <우리>와 <남>의 밖에 자리해 있는 <것>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이다. 이런 나는 <나>나 <우리>나 <남>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의 쪽까지 모두 함께 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편리한 생활을 위해서 화석연료를 태워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거나, 화석연료로 만든 비닐을 쓰고 버릴 때, 풀이나 나무나 물고기나 거북과 같은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 최봉영 선생님의 글에 대해서는 아직 덧붙일 만한 생각이 없어 그냥 옮기고 읽어 보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나>를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로 보느냐 아니면 모두로서 함께 하는 쪽인 <나>로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나>로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일이 크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온인 <나>를 <나>의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남까지 함께 하는 일이나 것까지 함께 하는 일이 왜 마땅한 일이고 왜 중요한 일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계층갈등, 지역갈등, 환경오염, 생태 파괴와 같은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모두로서 함께 하는 쪽인 <나>에 대해서 깊고 넓게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