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투 원>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
지난 글에 이어 <제로 투 원>을 6장 '스타트업은 로또가 아니다'를 읽고 배울 수 있는 내용을 씁니다.
모든 기업은 자신만의 고유한 환경에서 시작하며, 모든 기업에게 시작은 단 한 번뿐이다. 표준 크기가 1일 때는 통계가 나올 수 없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하며 붙인 제목이 생각납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 토론할 때 '운'이란 언제나 과거 시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관한 질문이다. '미래는 우연인가, 디자인하는 것인가?'
양자택일 질문에 대해 저는 주관식으로 쓰고 싶습니다. 저는 명리학을 배우고 나서는 스스로 '운명론자'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그저 일종의 '출사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타고난 몸을 바꿀 수 없다면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마치 제가 쓴 글인양 자연스러운 내용을 수사까지 붙여 쓴 아름다운 문장들입니다.
반면에 미래를 명확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을 것이다. <중략> 가장 하고 싶은 것 하나를 정해서 그 일을 한다. <중략> 즉, 한 가지를 독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2017년 부자 아빠 시리즈 6권을 읽고 깨달은 내용이 떠오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다윗'은 어쩌면 자아실현의 다른 이름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피터 틸의 '불명확한 낙관주의'는 고미숙 선생님 버전으로 바꾸면 '운명을 받아들여라'입니다.
오늘날 여론을 좌우하는 부유한 베이비붐 세대들은 자신들의 순진한 낙관주의를 의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뻔히 정해져 있는 커리어가 그들 자신에게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커리어가 자녀들에게는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피터 틸이 '나때 증후군(?)'을 알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
베이비붐 세대가 성공한 개인에 관한 책을 쓰면, 그들은 특정 개인의 환경이 갖는 힘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중략> 베이비붐 세대 전체가 어릴 적부터 우연의 힘은 과대평가하고 계획의 중요성은 과소평가하도록 배웠다는 사실 말이다.
피터 틸의 설명보다는 <대체 뭐가 문제야>에서 제랄드 와인버그가 한 설명이 훨씬 세련된 듯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 시대의 교육 방식에 세뇌되어 문제를 풀 줄만 알지 스스로 정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주장 말입니다.
2017년 기요사키의 책 6권을 읽지 않았다면 못 알아들을 이야기입니다.
금융이야말로 불명확한 사고의 전형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야 부를 창출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를 때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금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신교 교인이면서 주일마다 교회를 회사처럼 출근(?)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한 권쯤은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다음 표현은 반만 동의하게 되는 표현입니다.
계획 없는 진보를 우리는 '진화evolution'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다윈도 그렇게 말했다. 생명체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아도 '진보progress'하는 경향이 있다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유기체의 무작위적 재현이며, 그 재현을 가장 잘 해내 개체가 승리한다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 나머지 반은 도올 선생의 도덕경 해설이나 영화 <역린>의 중용 대사에서 배운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소제목입니다. 그리고 생소하지만 귀가 솔깃한 구절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불명확한 단기적 세상에 살다 보니 장기 계획은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중략> 바로 이런 계획의 힘 때문에 비공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진다. <중략> 미래가 제멋대로 펼쳐질 거라고 보는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훌륭하고 명확한 계획을 가진 회사가 언제나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곱씹어 읽어 보면 믿음이 다른 주변의 두 부류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중에서 지금의 제가 소화한 한 가지는 <전략적 로드맵>입니다.
반면 다른 하나는 희망을 품고 해 나가는 일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기업을 세우는 일은 당신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작지만 중요한, 세상의 일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려면 먼저 우연이라는 불공평한 폭군부터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복권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