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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Dec 04. 2023

존비어체계와 민주적 인간관계의 충돌(上)

묻따풀 2023

지난 글에 이어서 최봉영 선생님의 사람됨에 대한 풀이를 스스로 묻고 따져 풀어 보기로 합니다.


인격과 존비어체계

최봉영 선생님 글을 이어서 봅니다. 긴 글이라 '7. 인격과 존비어체계'에는 7이라는 번호가 붙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은 모든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대한민국은 사람을 신분으로 나누어서 차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법으로는 누구나 대등한 인격 관계에 놓인다. 사람들이 인격을 신분으로 갈라서 차별하는 경우에 법에 따른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위로 나누어서 인격을 차별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격을 신분으로 나누어서 차별하던 버릇 때문에 인격을 차별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앞서 혼란을 겪었던 제 머릿속 과정을 설명해 주는 구절로 보이기도 합니다. 법적으로는 차별이 금지되어 있는데, 노골적으로 차별적 발언을 하는 집단이 존재합니다. 그런 이가 임명권자에 의해 장관으로 지명된 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2023년이니 민주공화국이 된 지 75년이 지났는 데에도 아직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조선시대 사대부 같은 이들이 누구를 가르치거나 통치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이들은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세력은 아닙니다.


인격 차별 금지는 법으로만 이룰 수 없는 일

한편, 배우 정우성과 '비트'의 감독을 좋아하기에 '서울의 봄'을 개봉 다음날 봤습니다. 1979년 일어난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의 막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박진감 있는 전개에 명연기로 몰입해서 봤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체계는 물론 군의 지휘체계까지 무시했던 과거사를 보면서 후보 시절 그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현 통치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뿐 아니라 다수의 페벗님이 영화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고 느낀 듯합니다.

하나회 다음은 윤석열 라인인가?

계속 선생님의 글을 보겠습니다.

한국사람은 대한민국이 출범한 뒤로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민주화를 추진함으로써 제도의 측면에서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날의 모습을 보면 인격을 차별하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화를 본 탓인지 <다스뵈이다 287회>를 보는데 묘하게 하나회가 누린 특권이 윤석열 라인으로 알려진 이정섭 검사에게도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스뵈이다 286회>를 보면 이정섭 검사와 달리 연예인들은 범죄가 확인도 되기 전에 언론에 정보가 흘려져서 낙인이 찍히는 차별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분제도가 사라졌음에도 신분으로 인격을 차별하는 일을 예사롭게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다짐을 두는 경우에도 그런 일이 쉽게 벌어진다.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놓이는 것은 신분제도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 어떤 것이 계속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비어체계와 민주적 인간관계의 충돌

앞선 최봉영 선생님의 글과 달리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즉각 공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말에서 볼 수 있는 존비어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존비어체계가 버릇으로 굳어지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관계를 유사신분관계로 바라보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이 유사신분관계 속에서 사람을 신분으로 인격을 갈라서 차별하는 일은 숨을 쉬는 일처럼 쉽게 일어난다.

누군가를 '님'으로 부르거나 '씨'로 부른다는 점만으로 제가 누군가를 차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존비어체계가 '유사신분관계'를 조장하는 혹은 장려하는 측면이 있느냐 하는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하대하는 말습관 그리고 거기에 항의(투쟁)하기는커녕 인정하고 주눅이 든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양상이 존비어체계와 어떤 관계인지는 직관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선생님의 글로 돌아갑니다.

조선왕조에서 존비어체계는 신분에 따른 인격 차별을 강화시켜 주는 일을 함으로써 왕조체제를 지키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구실 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사회에서 존비어체계는 사람들이 민주적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구실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적 인간관계와 차별적 존비어체계 사이에 끊임없이 마찰과 충돌이 빚어지게 된다.

그렇습니다. 존비어체계의 효과 측정에 대한 문제를 벗어나서 위 문단은 '존비어체계와 민주적 인간관계의 충돌'이라고 이름 지어 보면 선생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문장이 그 피해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민주적 인간관계와 차별적 존비어체계를 놓고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사람들이 민주적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으려면 존비어체계에서 비롯하는 유사신분관계를 벗어나야 한다.

저는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는 데 시킨 적이 없는데, 아이들이 저에게는 존대를 하고 엄마한테는 반말을 씁니다. 아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답을 못하고, 엄마한테 그때만 존대를 하는 것으로 대응을 합니다.[1]


유사신분관계 질서가 마땅해 보이는 이들

드디어 납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존비어체계로 말미암아 마주하는 모든 것을 유사신분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나이, 성별, 학벌, 지위, 재산 따위를 잣대로 신분의 높낮이를 나누고 말투를 달리해서 인격을 차별하려고 한다. 그들은 ‘소화기 질환’을 두고서도 신분에 따라서 말투를 달리해서 “저 선생님께서 소화기 질환을 갖고 계시다.”라고 말하고, “저 학생은 소화기 질환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러니 사람들은 유사신분관계 속에서 인격의 높낮이를 놓고서 끊임없이 인격 투쟁을 벌이게 된다.  

스트레이트 보도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촛불 시위를 주도한 국민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 현 정부 요직에 앉았다고 합니다. 퇴행적 현상이라고 평했었는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소위 유사신분관계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잣대라고 믿는 이들이 집권세력이라고 가정을 해 보았더니 이들의 논리를 짐작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가치체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권위주의'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말의 힘을 인정하면 권위주의를 지탱시키는 강력한 장치가 어쩌면 존비어체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니고 글을 쓰는 지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시작했다고 봐야겠죠.


높임말과 굽신거림을 욕망하는 사람들

다시 최봉영 선생님의 글로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유사신분관계 속에서 인격 투쟁을 벌이게 되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인격 투쟁의 빌미로 삼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인격 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꼬투리가 잡히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든 신분을 높여서 사장님, 회장님, 선생님, 사모님, 고객님 따위로 부르게 된다. 신분을 높여서 부르게 되면, 실제와 맞지 않더라도 뒤탈이 생기지 않는다.

선생님이 설명하는 현상과 '인격 투쟁'이라는 지칭 사이에 연결이 여전히 어색합니다. 아마도 인격 투쟁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어서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내용은 익숙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마음에 안 들던 말버릇도 떠오르고, 1994년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지인이 손님 얼굴을 못 알아봤다고 따귀를 맞은 사건도 떠오릅니다.


다음 문장은 따귀 맞은 사람 혹은 비슷하게 직장 내 언어폭력에 시달린 사람 입장에서 읽어 봤습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상대를 부르는 호칭의 격을 계속 높여 왔다.

신분에 상응하는 지위를 얻으려는 '인격 투쟁'을 하는 사람에게 맞서는 이가 직장을 잃거나 평가에서 손해를 볼까 봐 상대의 지위를 인정해 줄 만한 개연성은 충분하네요.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신분제도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상대를 양반으로 높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나 양반으로 불리게 되니 양반이 값싼 말처럼 되어서, 사람들은 양반을 낮춤말처럼 듣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네요. '이 양반아'라는 표현은 높임말로 들리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은 너나없이 상대를 사장으로 높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사장으로 불리게 되니 사장이 값싼 말처럼 되어서, 사람들은 상대를 회장으로 높여서 불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내용이 길어 이하는 다음 글로 넘깁니다.


주석

[1] <육아란 무엇인가?>를 쓰기 이전 아직 육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줏대와 잣대가 없을 때, 큰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보면 큰 소리로 혼을 낸 일이 몇 차례 있습니다. 몇 년 뒤에야 아이가 아빠는 평소에 착한데, 가끔 엄청 무섭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이로 짐작해 보면 아이들이 공포 때문에 존대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반성이 되고 그보다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잘하려고 노력하니 다행이지만요.


지난 묻따풀 2023 연재

1. 한국말에서 위함과 바람과 꾀함과 보람

2. 욕망하는 두 개의 나: 온인 나와 쪽인 나

3. 사람으로 살아가는 네 가지 일

4. 두 가지 온인 나 그리고 쪽인 나로 살필 여섯 가지

5. 사람들이 한국말로써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

6. 사람들이 영국말로써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

7. 한국사람에게 힘은 무엇을 말하는가?

8. 영국말로 세상을 담아내는 방식을 활용해 보자

9. 영국말에서 있음, 꼴됨, 이됨, 일됨 살펴보기

10.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

11. 한국말은 어떻게 나눠지는가?

12. 한국말에서 문장은 곧이말을 풀어내는 것이다

13. 한국말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14.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

15. 한국사람에게 나 그리고 인간(人间)은 무엇인가?

16. 한국사람이 임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

17. 언어로 빚는 살리는 힘을 조직하는 능력

18. 한국사람에게 사람됨이란 무엇인가?

19. 사람됨 안에 쌓이고 녹아 있는 문맥

20. 줏대와 잣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보기

21. 사회적 성공과는 기준이 다른 줏대

22. 줏대와 잣대로 삶의 순간들을 차려 보자

23. 한국말에서 사람됨과 인성, 인품, 인격

24. 사람됨의 줏대 : 주관(主觀)

25. 줏대를 펼쳐서 누리는 힘 : 권리(權利)

26. 보편적인 인권 그리고 내 삶의 균형

27. 사람의 구실 : 자격(資格)에 대한 묻따풀

28.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인격에 대한 욕망

29. 인격을 존중하거나 무시하는 일

30. 대한민국에 인격 차별이 존재하는가?

31. 인격 차별이라는 유산과 수평적 소통

32.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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