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2023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서 최봉영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쓰신 글을 가지고 스스로 묻고 따져 풀어 본 기록입니다.
아래 부분을 읽을 때 '어떤 사람으로서'라는 문구에 밑줄을 치고 Role이라고 썼습니다.
사람은 그냥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이를테면 사람은 너나없이 젊은이, 늙은이,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 지어미, 지아비, 학생, 교사, 경찰, 군인, 정치인, 회사원, 소설가, 화가, 음악가와 같은 어떤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그리고 '정체성'이라고도 썼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고 자연스럽게 역할(Role)을 인식합니다. 더러 그 역할을 사회적 정체성으로 인식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기회[1]에 사전을 찾아보니 지식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정체성은 다양한 의미로 정의되는 포괄적인 말이라 '사회적 정체성'으로 구글링 하니 다음과 같은 요약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문장은 마침 보고 있던 영상에서 배운 내용과 묘하게 시너지를 낳습니다.[2]
이런 까닭으로 사람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을 잘하려면 누구를 어떤 사람으로 알아보고, 알아차리고, 알아주는 일을 잘해야 한다.
<관계는 나로 인해 생겨나지만 내 것은 아니다>를 쓰면서 관계와 바운더리에 대한 인식이 더욱 분명해진 효과로 인용문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일을 잘하려면'이라는 단서가 박문호 박사님의 아래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됨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그냥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사람이 된다. 이를테면 젊은이가 되는 과정을 거쳐서 어떤 젊은이가 되고, 교사가 되는 과정을 거쳐서 어떤 교사가 되고, 피난민이 되는 과정을 거쳐서 어떤 피난민이 된다.
그 과정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우리의 인식에 바탕을 둡니다. 작년에 쓴 기록 중에 <만남은 기회이니 기회를 여는 대화를 준비하라>가 있습니다. 그때 만남을 점으로 표시하고 과정을 선으로 그어 본 적이 있습니다.
반면 <자아실현을 돕는 교육은 어디 있는가?>를 쓸 때는 직접 그린 것은 아니지만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을 '자아실현'의 상징으로 인식하여 인용한 일이 있습니다. 점을 연결한 선과 중력을 거스르고 올라가는 묘사는 분명 다른 느낌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삶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인식과 과거의 내가 만든 행동 양식이 중력처럼 작용한다는 인식을 모두 갖고 있기에 두 가지 다 효용 가치가 있는 비유라 생각합니다.
한편, 시간 순으로 벌어지는 인과관계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법도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는 최근에 시골 농부님의 글을 접하면서 인식하는 관점인데, 최근 페북에서 읽은 '자유 의지'에 그 대강이 담겨 있습니다.[3] 아직은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나타나는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전제로 행한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최근 복수의 글에서 익히고 있는 개념인 '연기(緣起)'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수동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능동의 주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응 행위들은 사전에 형성된 자동 알고리즘에 의하여 저절로 작동됩니다. 능동적 행위가 개입될 수 없는 좀비적 현상입니다.
두 번째는 의도나 예상과 달라지는 현실을 대응하는 인식의 틀로 제가 전략적 로드맵이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목표와 실제가 달라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맞추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발상은 다소 상호 모순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약간은 그 쓰임이 다릅니다.
최봉영 선생님의 위 문단을 보면서 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김영식 님의 '자유 의지' 개념을 해석하는데 적용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절로 되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되는 것이고, 셋째는 탓으로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젊은이가 되는 것은 절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바탕을 두고서 되는 것이고, 선생이 되는 것은 스스로 일으키는 어떤 일에 바탕을 두고서 되는 것이고, 피난민이 되는 것은 탓으로 벌어지는 어떤 일에 바탕을 두고서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 의지' 에 쓰인 메시지는 언뜻 보면 선생님이 구분한 세 가지 모두 '절로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박문호 박사님의 알려주신 경계에 대한 인식이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다루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섣불리 대응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는 대신에 '자유 의지'란 글이 저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인 '자기 해체 알고리듬'만 취합니다.
그 과잉된 비효율에 대한 각인이 가중치를 부여하며 새로운 자동 알고리즘을 만듭니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 방식인 자기 강화와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로운 방식을 저는 '자기 해체 알고리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신경망들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 불필요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되며, 연기적인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내가 한다는 인식을 벗어나면 내가 일부가 되어 이루어지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쪽인 나' 인식과 통하는 인식입니다.
최봉영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의도치 않게 '자기 해체 알고리듬'을 다시 살펴봅니다. 작년에 29편의 시리즈를 쓰면서 익혔지만, 뿌연 느낌이 있었는데 여기에 더하여 최근 우연히 잡은 <테니스 이너 게임>을 읽으면서 다시 배우던 참이었습니다. 시골농부님 표현을 빌면 '사고지능'의 개입을 끄고 '자연지능'을 믿고 잠재력을 펼치게 하면 무아(無我)라 불리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 <테니스 이너 게임>에도 그대로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29편의 시리즈를 그 묘사가 더욱 와닿았습니다. 반복의 힘인지 그 사이에 제가 더 절실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시 최봉영 선생님 글로 돌아가면, '절로 되는 것'과 '탓으로' 되는 것은 관계의 수동적인 면을 잘 활용하여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절로'인지 '탓으로'인지에 대한 인식 구분이 아주 명쾌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스스로' 되는 것은 사고 작용이 필요하지만, 지나친 사고 작용으로 인해 잘못된 인식을 하고 스스로 고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오랫동안 인류가 증명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허구가 물리적으로 구현된 문명 세계에 살면서 사고지능을 어떤 식으로 꺼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글이 길어져 다음 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1] 말을 쓰기 바빠서 묻따풀을 하면서 차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기회로 표현했습니다.
[2] 시간이 만든 우연은 정말 대단한 듯합니다.
[3]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문호 박사님 <월말김어준> 강의를 2년 넘게 들으며 쌓인 과학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두 가지 온인 나 그리고 쪽인 나로 살필 여섯 가지
10.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
11. 한국말은 어떻게 나눠지는가?
13. 한국말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14. 한국사람에게 사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