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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an 12. 2024

아직 잔재가 남았지만 곧 사라질 형식적 권위주의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최봉영 선생님의 페북 글《한국의 지식인과 얼치기 낱말》중에서 '2. 사람이 낱말로 생각을 펼침' 구절에서 07 ~ 12까지의 다발말[1]에 대해 묻고 따져 풀어 보는 글입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의 어려움

지금은 알듯한 말 입니다만, 아마 <사티어의 빙산 의사소통>을 읽기 전이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다발말[1]입니다.

07.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사람과 흐릿하게 펼치는 사람이 마주하게 되면 생각을 주고받는 일이 매우 어렵다.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이들은 말속에 있는 낱말의 뜻을 하나하나 살펴서 말을 주고받으려는 반면에 생각을 흐릿하게 펼치는 이들은 말속에 들어 있는 낱말의 뜻을 그냥 대충 짚어서 말을 주고받으려 한다. 그들은 낱말의 뜻을 알아보는 일에서부터 생각이 서로 방향을 달리한다.

하지만, 아직 또렷하게 펼치지 못하고 있는 터라 또렷하게 펼치는 이와 흐릿하게 펼치는 이가 마주하는 대화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실제 경험은 부족합니다.


그래서인지 최봉영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내가 컨설팅을 하면서 익힌 대화법을 도식화한 <성공적 대화를 돕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당시에 사람들의 대화의 기저에 수면 아래 빙산처럼 말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바탕이 맥락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모르는 이들이 많아습니다. 

최봉영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낱말의 바탕까지 또렷이 익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참교육 시도는 실패한 일만은 아니다

다음 다발말을 보니 제가 또렷하게 생각을 펼쳐[2] 말하며 사는 통에 순탄치 않았던 시절을 보낸 기간들이 떠오릅니다.

08.
사람들이 낱말의 뜻을 또렷하게 알고서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면, 생각에서 앞선 사람과 뒤진 사람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생각에서 앞선 사람과 뒤진 사람이 누구인지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것을 꺼려는 일이 일어난다. 특히 권위나 권력에서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은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것을 크게 꺼려하는 일이 많다.

지금도 순탄치 않은 상황일 수도 있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이 안(?)에 머물러서 앞으로도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것을 꺼리는 삶'을 살 듯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는 점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09.
서열에 바탕을 둔 형식적 권위주의가 퍼져있는 곳에서 생각을 또렷하게 펼쳐서 앞선 사람과 뒤진 사람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하는 일은 크게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특히 서열에서 앞서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는 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도박을 펼치는 일과 같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토의하거나 토론하더라도 겉으로만 돌게 된다.

제 기억에는 대학 입학할 때부터 선배들이 집합시키면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교수답지 않은 교수에게는 지적도 하고, 집요하게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습(?)은 사회에 나와서도 할 말을 하며 살게 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담인을 만나고 달라졌다고 합니다. '참교육'을 외치다가 자기 보전에 위협을 느낀 선배 교사들과 육성회 학부모들에게 매도 당한 전교조 1기 선생님으로 기억합니다.


아직 잔재가 남았지만 곧 사라질 형식적 권위주의

전교조 선생님들이 해직되자 학교는 온통 형식적 귄위주의 천국으로 보였습니다.

10.
형식적 권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무엇에 대해서 묻는 것까지는 겨우 봐줄 수 있지만 무엇에 대해서 따지는 것은 결코 봐줄 수 없다. 형식적 권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 ‘묻지 마’, ‘따지지 마’, ‘하면 하라는 대로 해’와 같은 태도로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형식적 권위주의에 기대어 ‘꼴통 보수/진보’, ‘먹통 보수/진보’, ‘막가파 보수/진보’로 살아가게 된다.

고등학교에 갔더니 정치경제 선생이 여의도에 사는 힘 있는 학부모에게 수모를 당한 다음에 우리에게 분풀이[3]를 하면서 자기 생각이 한심한 줄도 모르고 털어놓은 일도 있었죠. 학교가 국영수 외에는 보충 수업을 안 시키는 곳이었는데, 그런 수모를 우리에게 풀고 싶었는지 너희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지만 집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꼴에 훈계라고 한 말이었는데, 자기는 수완을 부려서 집을 두 채나 마련했는데, 국영수 선생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공부나 해서 다들 못 산다나.


다음 사항은 이전에 따져 물은 내용이고 한국사람 일반에 대해서 다루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생략합니다.

11.
한국사람은 등수로 지위에 서열을 매기는 시험능력주의, 말투로 인격에 서열을 매기는 존비어체계 따위로 말미암아 형식적 권위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그들은 형식적 권위에 앞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학벌, 지위, 재산, 미모, 인격과 같은 것에서 형식적 권위를 갖고자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이에서도 형식적 권위를 갖고자 하기 때문에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만나면 태어난 달이나 날까지 따져서 차이를 두고자 한다.

12.
한국사람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형식적 권위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하고자 한다. 그들은 만나면 서로 제 생각을 제 식대로 이야기해서 생각이 부딪히지 않도록 만든다. 또한 그들은 남의 이야기를 끌어다가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만든다. 그들은 함께 하는 일을 함께 묻고 따져서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일이 형식적 권위를 건드릴 수 있다고 여겨서, 그것을 꺼려하거나 싫어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다만, 어디서 따졌는지 찾아 이를 남겨 둡니다.

존비어체계와 민주적 인간관계의 충돌(上)

존비어체계와 민주적 인간관계의 충돌(下)


주석

[1]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낱말의 뜻을 또렷하게 차리는 활동은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대화 상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3] 책상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라고 한 다음에 대걸레 자루로 등을 때렸습니다. 평소에 매질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첫 번째 분단만 숨이 턱 막히게 맞았습니다. (제가 그 줄이었죠.) 세 번째 분단쯤 가더니 땀이 얼굴에 보일 정도로 지쳐서 대걸레를 등에 가져다 대는 수준으로 체벌을 했습니다. 체력도 없는 분이 힘 조절을 못한 거라고 볼 수 있죠.


지난 묻따풀 2024: 함께 말 차리기 연재

1. 마주해야 보인다, 본 것에 마음이 가면 녀긴다

2. 정신을 차리고 터박이 바탕 낱말을 또렷하게 따져 묻기

3. 말의 바탕치, 짜임새, 쓰임새, 펼침새 따위를 살피다

4. 속말과 말차림: 대화에서 얻은 보물

5. 임자인 사람은 살리고 그 결과는 크다

6. 말과 마디말에 대하여

7. 개념의 구성 요소: 원칙, 생각, 믿음

8. 생각을 또렷하게 펼치려고 힘을 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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