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론적 세계관 몸으로 배우기
김기석 목사님의 <고백의 언어들>에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맛본 자유를 한껏 누릴 수 있었지만, 그 자유는 자족적인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유는 사랑과 잇대어 있었던 것입니다. 매이지 않는 자유의 세계와 접속했지만 다른 이들을 그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인데, '기독교적 영성'의 사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교인이 아닌 저는 여기서 <협상론적 세계관> 배양의 돌파구를 발견합니다.
물론 단순히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자는 욕망에 따른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꼭 해야 활동 중에 제가 낯설고 잘 못하는 일이 '협상協商'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바울의 이야기를 읽다가 이를 연상한 것이죠.
작년 초에 물었던 질문인 <나에게 경제적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연말 즈음에 깨달은 것이 제가 희망하는 '자족적 자유'는 평온한 마음 위에서 성립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망 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적 자유'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 병행해야 지속 가능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저에게 필요한 역량이 <협상론적 세계관> 체화 혹은 응용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최근 사건도 작용합니다. 베터코드 운영의 어려움을 감당한 결과로 삶이 중력처럼 선사한 배움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사건으로 코로나 이후 경영이라는 낯선 활동을 받아들인 일을 버거워할 때 만난 드러커의 기업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고 찾을 수도 없네요. 하지만, 기업을 서구 사회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하며 공공선을 추구하는 생산적 공동체 유형이라 말합니가. 이를 읽을 때 어떤 이유인지 제가 경영을 하는 일이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후에 또 몇 년의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 수입을 만드는 방법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중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아침 화상회의에서 그 소회를 나눈 바 있는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고백의 언어들>에서 같은 경험을 말하는 글을 만났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원죄를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죄에 대한 가르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중략> 죄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또 그 이야기야?'하고 질색을 합니다. <중략> 구조적인 악이나 죄에 대해 살피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어두워질 것입니다.
저는 더 나은 대안을 찾았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불편해하는 사실인 유전자의 힘으로 인해 혹은 그와 비슷하게 우리의 뇌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예측 기계'처럼 작동합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에 '밀항하는 수준'인 사람의 의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과학을 받아들이는 일은 신앙과 매우 유사합니다. 원하는 것만 직면(直面)하고 원치 않는 장면은 외면(外面)하려는 충동을 이겨내려면 '사실충실성'을 키울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원죄 은유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는 사람인 동시에 동물이라는 해석이 원죄를 주장하는 것보다 제 마음에 듭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죄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타자他者가 없다고 한다면 죄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나 혼자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기석 목사님이 짚은 포인트, 즉, '타자가 없다고 한다면 죄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유용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성당에서 배운 '이웃 사랑'과 맥락이 닿고 또,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규정에도 부합하죠.
여기서 더불어 사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타자라는 현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게 인간입니다. 내 삶이 소중한 것처럼 타자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만 살 수 없습니다. <중략> 저는 죄란 타자와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서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를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무한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때, 다시 '협상론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됩니다. 결국, '협상'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의 바탕에 타자를 나와 같이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맥락이나 초점에 따라 이를 '이웃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고 '협상론적 세계관'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란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