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둘러싼 이야기와 사업하는 이유
HBR (한글판 9-10월호)에 <일리 커피 회장이 말하는 농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 만들기>라는 기사를 보고 난 직후 우연히도 커피 원두에 대해 알려주셨던 사장님이 계신 카페에 갔다. 매일 커피를 마시지만 커피에 대한 지식에는 무심했던 나를 자극한 분인지라 각별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고 대뜸 일리 커피와 공정 무역에 대해 아시는지 여쭤보았다. 사실 요즘 다양한 방면에서 '기획이 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던 터라 현장에서 포착한 사실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시 말해 사장님이 굳이 공정 무역에 대해 아시는 바나 관심이 없어도 대화를 하는데는 무방하다 생각했다.
기사의 아래 내용을 기준으로 일리커피나 공정 무역에 대해 아시는지 여쭤보았다.
커피 원두를 공급하는 개발도상국 농부들에게 더 많이 분배되기를 바라는 갈망을 이야기할 때, 목소리는 갈라졌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다. 아버지는 세계의 커피 소비자들이 누리는 삶과 커피 생산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엄청난 격차에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변화를 선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커피숍 사장님은 그에 대해 답을 하는 대신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들도 얻는 게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바로 답을 못했다. 사장님과 대화를 잠시 멈추고 빠르게 HBR을 훑어보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내용은 아래 부분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참여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는 먼저 화학을 공부하고 커피의 풍미를 더 좋게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고집하셨다. 아버지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일리를 물려받았을 때 우리의 첫 번째 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중략> 내 논문의 제목은 '에스프레소 품질:커피의 과학'이었다. <중략> 우리는 일리의 생산에, 나중에는 물류에서 IT에 이르기까지 모든 운영에 더욱 관여하기 시작했다. <중략> 처음으로 시도한 계획 중 하나는 재배자들이 농작물에 도움이 되는 시스템과 장비에 대해 농업 전문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1999년 마침내 이 프로그램은 커피 대학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들이 R&D를 해서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 같다고 답을 했다. 사장님이 저자가 농장을 갖고 있는지 묻고 나는 (기사에 따르면) 공급만 하는 듯하다고 답을 했다. 기사 내용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이 정도인 듯했다.
공정 무역에 대한 사장님의 견해를 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관심 없던 커피 기사에 대해 목적 의식을 갖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즉흥 시도는 가치가 있었지만, 대화 가운데 나는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잡지를 훑어볼 때 카페 사장님이 '브라질'이라는 단어를 보신 듯했다. 브라질이 커피 생산량 1위인 것은 아는지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원두 실태와 커피숍 운영으로 사장님의 일상 문제를 이야기로 풀어주셨다.
구글링 해보니 브라질 커피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며 원두 가격이 상승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사장님에 따르면 커피 원두 작황 문제는 배추 작황과는 다른 문제라고 한다. 고품질인 아라비카 품종은 특정 위도에서만 자라는데 병충해에 약해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만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오호... 그렇군. 슬슬 <오리진>에서 읽은 내용 들이 스멀스멀 찾아온다.)
그런데 이상 기후로 그간의 산지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온난화 문제는 내년이라고 달라지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배추 작황 하고 다르다는 말씀이다. 최근 만난 원두 공급상의 견해도 본인과 같았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는 이런 실태가 전지구적 변화란 점에 초점을 맞추자 기사의 내용이 다른 맥락으로 보였다. 이런 전지구적 문제는 열악한 남미 등지의 커피 농가에 맡기는 것보다는 대기업의 연구개발 역량과 공급망 안정화 역량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1]
뒤이어 원두 가격 인상에 주변 커피숍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야기를 하셨다. 작년에 9개였던 주변 블록 커피숍이 16개로 늘었는데, 그중 메가 커피 등장으로 인해 저가 경쟁이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원두 가격 상승이 이어지니 많은 점포는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셨다. 사장님도 영향을 받긴 하지만 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비결을 공개했다.
커피 가격을 유지하는 대신에 좋은 원두를 고집하고 손님을 기억한다
공감하며 듣고 있는 가운데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일리 회장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에 지인이 나에게 왜 기업을 운영하는지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 질문 덕분에 생각과 대화가 이어졌고, 나는 '(나의) 기업 함수'를 만들 수 있었다.
중국에서부터 (기업의) Valuation에 대해 공부를 (길지만 소극적으로) 했는데 공시된 회사를 재무적으로 평가하는 기준 말고는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 평가를 객관화하는 일이란 점을 깨닫고 놀랐다. 그 시간이 자양분이 되고, 지인의 질문이 트리거가 되어 만든 생각의 결과물이다.
나는 기업이 길드처럼 모여서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항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걸 시장에 매출로 전환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중요한 두 가지 변수는 애초에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 그걸 증명해야 지속가능성이 만들어진다.
한편 <기업 = 지속 가능함 + 성장 가능성> 편에서는 지나치게 조직 내부적 관점에만 맞춘 생각을 담았다는 생각에 찜찜했던 기분이 다소 해소된 듯한 글이다.
사장님에게 나의 기업 함수 이야기를 했더니, 카페의 준비 없는 창업 남발 뒤에서 젊은이들은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이 한몫을 한다는 말씀을 했다. 정부가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한 자금이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이 빚을 지게 한다고 했다. 카페는 식당보다 진입장벽이 낮고 젊은이들이 느끼는 위상도 높아 쉽게 창업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동네에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지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는 상태에서 비싼 커피 장비부터 구입하면서 창업하는 행태를 안타까워하셨다.
대화가 끝나고 이렇게 글로 정리하다 보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고 무턱대고 열심히 하다 후회했던 때가 떠올랐다.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를 구해줬던 책은 <대체 뭐가 문제야>라는 인생 책이다.
다시 HBR 기사로 돌아가 일리가 왜 사업을 하는지에 해당하는 내용을 찾아보았다.
할아버지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커피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고’에 대한 그의 정의는 맛이 좋은 음료 그 이상이었다. 그는 또한 일리 커피를 할 수 있는 한 제일 나은 방법으로 생산하기를 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일리를 네 가지 기둥 위에 세운 비즈니스 모델로 다듬어 왔다. 즉 최고의 생산자를 선정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최고의 품질을 보상하고, 열정을 바탕으로 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자와 고객, 직원, 공급자, 그리고 우리가 운영하는 지역주민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 것을 목표로 한다. 일리 설립 90주년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이 전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내 경험이 아니니 막연하기도 했지만, 90년 대를 이어온 가치는 무게감이 달랐다.
한편, 브라질의 수확량에 대해 알게 되니 요즘 흥미롭게 읽고 있는 <오리진>이 떠올랐다. 책에서 왜 브라질이 커피 수확량 1 위인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다뤄진다.
다량의 커피가 브라질에서, 설탕이 카리브해에서, 목화가 북아메리카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유럽 시장에 공급된 이러한 상품들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에 또 다른 대륙 횡단 교역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대서양 삼각 무역은 값싼 목화와 설탕, 커피, 담배를 원하는 유럽인의 끝없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연결했다. <중략>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가 식민지인 브라질과 카리브해와 북아메리카의 농장 소유주들에게 팔았다.
카페 사장님과 대화 직전에 봤던 김희종 대표님의 페북 글도 대화 소재가 되었다. 글을 소개했더니 차마고도가 중국에 있지 않냐며 중국의 고지대부터 확인하셨다. 원두가 자라기 좋은 환경에 대한 배경 지식 때문일 것이다.
'달달한 커피'에 대한 김희종 대표님의 전망에 대해 카페 사장님은 우리도 '둘둘둘 커피'를 마시던 시절이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가 원두 품종을 소비자들이 감별할 수 없던 때라 돈벌이가 되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했다. '다방 커피' 혹은 '믹스 커피'라는 표현만 알고 있어서 '둘둘둘 커피'란 표현이 재미있었는데 구글링 해보니 기사가 나온다.
[1] 방송 등의 미디어에서 신흥 플랫폼의 부작용에 대해 연일 보도하는 상황에서, 대기업 주도의 플랫폼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예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