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회, 드러커를 만나다 5
경영자를 기관이라 정의한 것은 굉장히 상징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기관인가?
경영자란 하나의 기관(organ)이며, 기관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행하는 직능을 통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규정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서 Organ의 뜻을 찾아보면, 정부 기관의 부서로 응용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생물학 용어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In biology, an organ is a collection of tissues joined in a structural unit to serve a common function.
그리고 이는 네이버 동물학백과 정의와도 상통한다.
세포가 모여 조직(tissue)이 되고, 서로 다른 여러 조직들이 모여 통합된 구조를 형성한 것이 기관(organ)이다. 기관은 몸의 특정 기능을 수행하며, 동일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모여 기관계(organ system)를 형성한다.
생물학 지식으로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다시 드러커의 정의를 보자.
경영자란 하나의 기관(organ)이며, 기관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행하는 직능을 통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규정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기관(organ)은 세포가 모여 조직화된 상태에서 기능을 수행하는 첫 번째 단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고유한 기능의 출발점이 기관이다. 그 하위 요소는 기능의 관점에서는 가치가 없다. 여기서 22쪽 문장을 살펴보자.
경영자는 그 존재의 정당성과 권위를 오직 그가 생산하는 경제적 결과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경영자의 첫 번째 기능으로 '경제적 성과의 창출'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이렇게 경영자의 기능을 살펴보면 두산백과의 기관 개념 정의와도 일맥상통한다.
법인 기타 단체의 의사 결정이나 그 실행에 참여하는 지위에 있고, 그 행위가 법인이나 단체의 행위로 여겨지는 개인 또는 그 집단.
뒤이어 23쪽의 문장은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고 느껴졌다.
경영자의 모든 행동, 모든 의사결정, 모든 고려 사항은 언제나 경제적 차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크게 두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25쪽에 상술한 내용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다.
경영을 "과학적"인 것으로 또는 "직업"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것이 아무리 진지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마침내 "혼란을 야기하는 귀찮은 일들"을, 즉 기업 활동의 불가측성-기업의 위험, 기업의 영고성쇠, "소모적 경쟁", 그리고 "소비자의 비합리적 선택"-을 제거하려는 성장 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과학적'이란 말에 대한 상술은 없지만, 건조하게 사실을 밝히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데이터를 중시하는 태도와 '과학적'이 연결된다. 하지만, 이는 경제적 활동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 그 데이터를 중시하는 태도가 경제적 성과를 창출해야 경영자가 될 수 있다. '직업' 역시 드러커의 추가 설명은 없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혹은 자신의 역할을 (조직이나 기관계에서) 분리해서 행동하는 방식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내용들은 이미 <혼란을 야기하는 귀찮은 일들을 다루는 경영> 편에서 다룬 일이 있다. 지인이 게임회사 직원이 게임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드러커의 견해와 유사하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직원 개인은 '직업'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를 조직으로 활용하여 결과를 낼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 지원은 경영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드러커 책 60쪽 내용과 관련이 있다.
사업이란 이익의 관점으로만 규정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사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중략> 하지만 이 대답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질문과 전혀 관련이 없는 대답이다.
이상의 내용은 작년 11월 28일 써 두었던 내용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드러커를 만날 시간>을 쓴 후에 이 내용을 들춰내어 제 안에서 재구성을 하고 소화를 하여 글을 이어 갑니다.
경영의 목적이 이익 창출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책 59쪽 <사업이란 무엇인가?>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사업은 사람이 시작하고 또 경영한다는 것이다. 사업은 "강제적 힘(forces)"에 따라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중략> 경제적 힘은, 그 스스로가 사업이 무엇인지, 또는 사업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앞서 인용한 표현을 떠올려 보면 알듯 말듯합니다.
경영자는 그 존재의 정당성과 권위를 오직 그가 생산하는 경제적 결과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결과가 힘을 갖게 하니 중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만드는 내용에 해당하는 사업 자체가 결과는 아닙니다. 성과가 본질이 아닌 것처럼요. 61쪽 내용을 부연으로 인용할 수 있습니다.
수익성은 기업이 활동하는 목표가 아니라 그런 것을 제한하는 요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뒤로 미루고, 왜 경영자가 기관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가 찾은 답변에 영감을 제공한 야구 콘텐츠가 있습니다. 지난 11월 말 즈음에 봤던 야신 님의 영상입니다.
야신 김성근 감독님의 비판은 <혼란을 야기하는 귀찮은 일들을 다루는 경영>에서 다뤘던 드러커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기업은 진정한 통일체여야만 한다. 기업은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품들을 합한 것보다도 더 커야 하고, 또는 적어도 부분품들을 합한 것과는 달라야 하며, 기업이 산출하는 것은 모든 투입 요소를 합한 것보다도 커야만 한다.
야신이 지적하는 프런트는 아마도 당신 자기들의 성과나 안위만을 중시한 모양입니다. 드러커가 경영은 '직업'일 될 수 없다는 식으로 기록한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통일체로 활기를 불어넣고 결과를 만드는 단위이기에 기관(Organ)이라고 일컫는 일이 합당하게 여겨집니다.
여기까지 풀이하고 나니 1장에서 모호하게 여겨졌단 다음 문단이 다소 명쾌해진 듯합니다.
경영자는 아마도 서구문명이 존속하는 한, 사회의 기본적 지배적 기관으로서 존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영자는 현대산업사회 시스템의 본질상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 시스템이 그 생산자원-인적자원 및 물적자원-을 위탁하고 있는 현대기업이 경영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난 안영회, 드러커를 만나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