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Mar 30. 2023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지난 글에 이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의 1장을 읽고 영감을 주는 내용을 옮기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난해한 문장이다.

카메라는 사물의 순간적인 모습들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든 이미지에는 시간이 없다는 관념을 깨뜨려 버린다. 달리 말하면, 카메라는 시간의 경과라는 관념을 시각적 체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알려주는 듯도 하다. 카메라로 사진이 찍힌 시점과 이미지로 저장된 사진을 보는 시점은 다르다. 현재(나의 시점)와 시각적 체험을 뗄 수 없는 말로 이해된다.


나는 다음 문단을 읽을 때, 바로 '아우라(Aura)'라는 말을 떠올렸다.

카메라의 발명은 그것이 발명되기 훨씬 이전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중략> 카메라가 어떤 그림을 복제하면, 그 이미지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그 결과 그 이미지의 의미는 변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가 여러 가지로 늘어나고 많은 의미들로 조각조각 나누어진다.

<미디어 아트의 범용화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편을 쓸 때, 참조했던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 내용을 쉽게 설명해 주었던 유튜브 영상 덕분이다. 1장 말미에 보면 내가 발터 벤야민을 떠올린 일이 우연이 아님을 저자가 알려 준다.

이 첫 장에 담긴 많은 생각들은 사십여 년 전 독일의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이 쓴 글에서 빌려 왔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기계 복제 시대의 미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이며...


제의(祭儀)에서 출발한 예술이 갖던 아우라

 그때 배운 내용에 따라 다음 문장을 읽을 때, '아우라 상실'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각각의 집에서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보인다. 카메라에 의해, 관람객이 그림을 향해 가기보다는 그림이 관람객에게 온다. <중략> 회화작품이 복제되는 시대에 그림의 의미는 더 이상 그것에 부탁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이제 다른 곳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정보가 되어 다른 모든 정보와 마찬가지로 써먹을 수도 있고, 무시될 수도 있게 되었다. 정보는 그 자체 안에 특별한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

아우라는 제의 경험의 일부로서 예술이 획득한 권위였다고 한다.

최초에는 제의(祭儀)의 경험이었던 예술적 경험은 삶의 나머지 부분과는 분리된, 정확하게는 그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전 글에서처럼 다시 한번 김영식 님의 페이스북 글을 떠올렸다.

초기 인류에게 언어의 중요 기능 중에 하나는 집단을 결속시켜 동원하고 그 힘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근대에 오지에서 발견된 모든 원시적 부족들도 공통적으로 주술적인 집단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술이 샤머니즘의 진화 과정에서 등장한 산물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정보로 전락(?)한 이미지

그림이 영화 카메라로 복제되었을 때 그것은 영화 제작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위한 자료가 된다. 한 그림 이미지를 복제한 영화는 관객들을 그 그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 사람의 개인적인 사고로 인도해 간다. 그 그림은 영화 제작자에게 작품의 권위를 빌려 준다.

그리고 그림에 글을 추가하면 그림의 역할이 또 바뀐다.

말이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이제 문장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문장을 숫자로 표현한 현상으로 치환하면 데이터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그림이 된다.

어디에도 친절한 은총알 따위는 없고 그림으로 만들어진 많은 데이터는 주관적으로 적힌다. <중략> 숫자로 표현된 상황이나 현상에서 빠르게 얻기 힘든 통찰을 훨씬 쉽게 얻는 데 잘 만들어진 그래프만큼 좋은 도구도 없다.

놀랍다. 그간 내가 '시각화'란 말을 매우 편협하게 써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기에서 말들은 그 언어적인 권위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그림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논리적으로는) 박물관을 만드는 세상

이미지가 정보가 되었다는 말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는 문장이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지가 간직한 권위는 그것이 등장하는 전체에 배분된다.

한편으로는 이미지가 컴포넌트화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난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2021년 불어닥친 'NFT 광풍'도 미술이 지닌 귄위를 기술이 활용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


논리적으로 박물관을 대체한다는 표현은 너무 멋지다.

각각의 판때기에 붙어 있는 모든 이미지는 동일한 어떤 언어에 속하고, 그 언어 안에서 어느 정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방 주인의 경험에 맞춰, 그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대단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선택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러한 판때기는 박물관을 대체한다.
출처: https://siseon.kr/jiffxsiseon08/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섬세한 묘사에 놀라게 된다.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시점과 누군가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효과가 생겨난다.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이 물질로 남는다니. 그걸 바라보면 그 시간으로 이동한 듯한 효과를 줄 수 있겠다. 물론, 그런 감상을 해본 일이 없어 관념적인 상상일 뿐이다.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모든 회화는 동시대적이고, 따라서 작품이 증언하는 내용도 즉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세잔(P. Cezanne)이 화가 입장에서 한 비슷한 이야기를 인용한다.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感光板)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정치적 문제가 된 과거의 예술

산업 혁명의 여파일까?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튼 제의에서 출발한 권위의 수단이었던 예술은 대중들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서 주류에 합류했다고 표현한 듯하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단 하나의 이유이다.


지난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1.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한다

2.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