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지난 글에 이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의 2 ~ 3장을 읽고 영감을 주는 내용을 옮기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라는 흥미로운 규정을 제시한다.
달리 말해 한 남자의 존재감은 그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시사한다.
남자를 먼저 설명하지만 지면은 주로 여자에 대한 설명에 할당한다.
한 여자의 사회적 존재, 즉 그녀가 타인 앞에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그녀에게 거의 본질적인 것이어서, 일종의 체온이나 체취 또는 분위기처럼 그녀의 몸에서 직접 발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남자와 다른 여자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 말한다.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그녀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략>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대번에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화장을 하는 여자와 거울에 비친 화장한 여자는 자아란 관점에서는 나누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연이어하게 된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앞선 글을 논란의 소지를 담고 있다고 느끼는 반면에 다음에 인용한 내용을 실용적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한 여자가 마룻바닥에 유리잔을 내동댕이치면, 이는 그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예시가 된다. 동시에 이런 행동은 그 여자가 타인들에게 어떻게 대접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 주는 표지인 것이다. 만약 남자가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면 그의 행동은 분노의 표현으로만 읽힐 뿐이다.
여자의 행동에서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읽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와, 멋진 문구다.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행동하는 대신에?
유럽 회화에서 최초의 누드화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나무 잎을 걸치거나 손으로 수줍게 몸을 가린다. 하지만 그 수치심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관객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것이다.
누드를 그린 것이지만 성경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는) 누드화의 범주에 넣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책에서는 누드화를 유화의 한 범주로 소개한다.
여자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유럽 유화의 한 범주가 있다. 바로 누드화다. 유럽 회화의 누드화 속에서 우리는 여자들이 일종의 구경거리로 보이고 판단되는 몇몇 기준과 관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이 읽으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이다.
사실 거울의 진정한 기능은 다른 데 있다. 거울은 무엇보다도 여자가 스스로를 하나의 구경거리로 대하는 데 동의하는 것처럼 만들어 준다.
반면에 거울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품어본 적이 없을 법한 생각이라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내가 누드화(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그림이지만)에 완전히 무지했음을 알려준다.
벌거벗은 몸은 그윈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소유한 사람(즉 여인과 그림 둘 다 소유한 사람)의 감정 혹은 요구에 복종한다는 표시인 것이다. 왕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때, 왕은 이를 여인의 복종의 증거로서 자랑하고, 그 그림을 보는 손님들은 왕을 부러워하게 된다.
처음으로 누드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기분이다. 물론, 앞으로도 누드화를 애써 찾아다닐 가능성은 없다.
케네스 클라크는 자신의 책 <누드(The Nude)>에서 벌거벗은 몸(naked)은 그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인 반면, 누드(nude)는 예술의 한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분명한 사실은 누드가 언제나 관심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중략> 누드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누드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띤다? 나는 둘 차이가 선명하지는 않았다. 이는 마치 <성공적 대화를 돕는 그림>에서 두 가지 다른 입장으로 진행되는 대화에 대한 인지가 쉽지 않은 측면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복장의 한 형식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누드를 그린 보통의 유럽 유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며, 남자로 상정된다. 모든 것이 그를 향하고, 모든 것이 그가 거기에 있는 결과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림 속 인물이 누드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낯선 사람이고, 여전히 옷을 걸치고 있다.
공교롭게 어제 아이들에게 <고흐> 책을 읽어 주면서 그가 세상이 원하는 그림 즉, 팔리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를 보여주려다가 고생하며 살다 간 모습이 떠오른다. 누드를 그린 주인공은 결국 화가의 시간을 지배한 사람을 뜻하는 듯하다.
아래 글은 현재의 거대한 포르노 시장에 대응하는 과거의 양상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우선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중략> 그녀의 육체 각 부분들은 그림을 보는 남자의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즉 그림은 그것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그녀의 성적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중략> 그녀는 미리 잘 검토된 여성성을 구경거리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흐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저항(?)한 삶이 떠오른다.[1]
여자들에겐 매우 불편할 수 있는 기록이지만 남자의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처음 보는 이야기지만 바로 납득이 된다.
정치인, 사업가 들은 이와 같은 그림들이 걸려 있는 벽 아래서 의논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회의 중에 누군가가 자기보다 더 수완 좋은 사람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면, 그는 고객을 들어 그림을 보며 위로를 구했다.
대한민국의 현대 사회에서 술자리에 여자들이 배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욕망의 양상을 비슷하게 유지되는 듯하다.
벌거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평범성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이 평범성이란 단지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되기까지 타인은 어쨌든 신비스러운 존재다.
저자는 시선이 이동하면서 신비스러움이 안도감으로 바뀌어 간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느끼는 안도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안도감이다. 앞서의 대단히 복잡하던 인식이 이제는 새로 맞닥뜨린 사실의 직접적인 요구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현실에 발을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즉 현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적 행위의 메커니즘을 상기시킴으로써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성경험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또한 불러일으킨다.
다시 읽어 보니 전에는 가볍게 넘어갔던 시선의 이동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우리의 시선은 눈에 집중되었다가 입으로 옮겨 가고, 또 어깨에서 손으로 옮겨 간다. 이 신체 부위들은 모두 섬세한 표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어서,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표현되는 개성은 여러모로 다양하다.
<월말김어준>에서 출연자의 몸짓을 관찰하여 느끼 바를 말해주는 김어준의 모습에서 배운 내용이다. 나는 대화를 할 때, 소리를 듣고 눈을 보는 외에 다른 부위를 관찰하는 인식은 부족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성기로 옮겨 가면 곧바로 그것의 형태 자체가 보는 사람을 일방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 버린다. 즉 타인의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성적 범주인 남성 혹은 여성으로 축소되거나 격상된다.
무슨 말인지 읽으면 알 수 있지만, 읽기 전에는 한 번도 인식해 본 적 없는 내용이다.
페미 현상과 함께 대중매체에서 남자들을 벗은 상반신을 쉽게 볼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균형이란 점에서는 변화가 있었지만, 성형의 보편화를 생각하면 저자가 지적하는 현상은 여전한 듯하다.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중략>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물론 존 버거식으로 말하면 위인전 작가가 고흐를 그렇게 보이게 하기 위해 덧칠한 내용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