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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Apr 02. 2023

유화는 왜 존재했는가?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지난 글에 이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의 4 ~ 5장을 읽고 영감을 주는 내용을 옮기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유화는 왜 존재했는가?

나는 그림을 사본 일이 없지만, 이 글을 읽은 후에 광고가 유화의 계승자라 믿게 되었다.

당신이 그림을 산다면 당신은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물건의 외양을 동시에 사는 것이 된다.

유화시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보는데 또다시 어제 아이들에게 읽어 준 고흐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화의 전통적 시각 방식의 토대는 인상주의 시기에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입체파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이와 거의 동시에 사진은 시각 이미지의 주된 원천으로서 유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전통적 유화시대는 대략 1500년에서 1900년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발터 벤야민을 알게 된 글과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하나만 존재하는 물건들, 미술 애호가는 자기가 소유한 그림들에 둘러싸여 있다. 미술 애호가와 달리, 시인이나 음악을 후원하는 사람은 음악 작품이나 시 작품에 둘러싸여 있지는 못했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쓸 때 배운 사항에 따르면 미술 애호가는 제의에 쓰였던 아우라를 욕망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NFT 샀으면 저작권도 내가 갖는 것 아닌가요?' 같은 질문은 사라진 아우라를 재건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다.

그림들은 그에게 구경거리(sight), 즉 그가 소유한 물건들의 모습을 구경거리로 제공한다.

나에게는 골동품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유화에 대해 처음으로 무지를 깨 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자기가 보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던 고흐의 고통

레비스트로스는 또다시 그림 컬렉션이 수집가의 자존심과 자기애(amour-propre)를 확인해 주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략>"부유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화가들을 일종의 대리인으로 봤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리인으로서 화가들은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또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고흐의 위인전 내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밀레를 롤 모델로 삼아 노동하는 사람들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내용을 보면, 그가 동생인 테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제적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회에 진출한 후에 줄곧 전문직으로 일했고 지금은 사업을 하는 나에게도 시대를 건너뛰어 '시장 가치'는 일종의 신앙일 수 있다. '사회적 가치'란 말을 더 자주 쓰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환 가치란 점에서는 대동소이한 말이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개발자들 역시 비슷한 데가 있어서 그들의 창작 욕구를 고취시키면서 시장 가치를 만들어내려면 나는 건강한 조직 문화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게 내가 사업을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호한 현대의 지배 계급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지금은 무얼까? 애매하다. 지금은 지배 계급이 누군가? 대중의 소비를 지배하는 무엇? 누구지? 누가 지배 계급이지?

유화는 사물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영향을 미쳤다. <중략> 유화는 모든 사물을 동등한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현실의 모든 사물은 물질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군. 가치를 측정하는 일이 유화에도 변화를 치르게 했다고 하면 비약이겠지만, 적어도 유화를 그리게 했던 욕망의 현대 발현에는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작으로 행운이 굴러들어 오게 하라>편에서 '피카소의 법칙: 다작으로 행운이 굴러들어 오게 하라' 등의 에피소드나 데이터로 인해 충분히 이해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고흐도 화가가 되기 전에 화랑에서 그림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화가 본인에게는 주문받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 또는 그림을 파는 일이 더 중요했다. <중략> 시장의 요구가 예술 자체의 요구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고흐가 인간적으로는 비참하게 산 이유도 그렇고, 사후에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설명하는 문장이다.

유화를 다른 회화형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묘사되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어서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물건인 것처럼, 그 질감, 광채. 입체감 등을 표현해 내는 능력이다. <중략> 그런 대상들을 하나씩 거칠 때마다 눈이 지각하는 것은 그림 자 내에서 이미 촉감의 언어로 번역된다. <중략> 이와 같이 표면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그 배경에 깔린 기술을 과시하는 것이 유화의 전통에서는 변함없는 요소로 남아 있다.

2023년에 유화를 그리게 한 욕망은 '메타버스'라고 불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1]

이렇게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의 '매력'은 소유자가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만족감을 시각적으로 줄 수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이 되고 싶었던 유화 주인

저자에 따르면 유화를 그리게 한 주인들은 대체로 전능한 존재로 인간 이하의 존재를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홀바인은 이 지구의 위에 그림 왼쪽에 서 있는 대사 소유의 프랑스 내 영지 이름을 첨가해 놓았다. <중략> 정복자와 정복당한 자의 이러한 관계는 계속해서 자동적으로 영원히 지속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중략> 서로 타자를 보는 방식은 그 자신에 대한 견해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메타버스에 대한 나의 섣부른 상상을 지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화의 표면적 사실성은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림에 그려진 물건들 아주 가까이 있다는, 즉 그림 전경에 있는 물건들은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중략> 그림 속의 동물들은 자연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좋은 품종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 족보를 강조하는 가축들이다. <중략> 동물들은 이렇게 네발 달린 값비싼 가구처럼 그려져 있다.

초기에는 순수했던 풍경화도 이후에는 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자연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 계급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더렵혀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려면 그 땅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앤드루스 부부가 자신들의 땅을 보며 느꼈던 즐거움 중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 즐거움은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덕분에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아래 문장을 볼 때, <월말김어준>에서 평소 관심이 없던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고 있는 문화사에서는 그런 해석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더욱더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생명력 없이 느껴지던 과거의 지식들이 인물의 성격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면 입체적인 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으로서의 유화

유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가시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일정한 관습의 특별한 체계에 의존했다. 이렇게 한데 모인 관습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유럽문화에서 재산과 예술 사이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고 한다.

누군가가 어떤 특정한 문화 분야에서 재산의 이해관계의 범위를 드러내 보여 주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누군가의 개인적인 집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평가는 기존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내리고 있는 그릇된 합리화를 더욱더 연장시킬 뿐이다.

또한, 저자는 대가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비판한다.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작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렘브란트나 <중략> 고야 혹은 터너에게 진정한 후계자는 없고 피상적인 모방자들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통에서 '위대한 예술가'라는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이 생겨났다.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열악한 물질적 환경에 맞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몰이해에 맞서,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맞서 투쟁을 하는 사람

예술을 넘어 프로젝트나 사업적인 성취와도 연결되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예외적인 작품이란 오랫동안 성공적인 투쟁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작품들이 아무런 투쟁 없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램프란트 후기의 자화상을 예외적인 작품의 예시로 설명한다.

후기의 자화상에서 그는 전통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전통의 언어를 가지고 전통 그 자체를 비틀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저 한 노인이다. <중략> 이 존재에 대한 질문, 질문으로서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노인이 된 그의 안에 있던 화가는 전통적으로 그런 종류의 질문을 배제하고 거부하기 위해 개발되어 왔던 바로 그 매체를 이용하여 바로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발견해 낸 것이다.


주석

[1] 지나친 일반화라는 사실을 알고 쓴 것이다.


지난 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1.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한다

2.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3.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4. 누드와 여성의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무지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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