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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Sep 21. 2024

양상사 혹은 주상사 - 3

연재소설 <블랙홀>


“나야 뭐, 우리 팀원들 고생해 주는 덕에 편하게 팀장 노릇을 하는 거지. 고마워. 거기다 혹시 여러분들이 나를 승진까지 시켜주면 더 고마운 거고.”


“승진을 뭐 우리가 시켜드리나요? 서장님께 잘 보이셔야죠.”


김석규가 속내에 농담을 섞어 말하자 조정석 역시 마찬가지로 받아넘겼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는 얼굴들이었다.


“야, 우리 팀장님이 서장님한테 아부하실 분이냐. 김재규 장군님의 일족인데 말이야. 자, 자, 우리가 서장님께 잘 보여서 팀장님 승진시켜버리자!”


오경문이 잔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어느덧 비는 그쳤고, 빗물이 고인 밤거리는 네온 불빛에 번들거렸다.


평소 김재규 장군의 일족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김석규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김재규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새로 부임해 온 형사과장 앞에서 김석규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심지어 숨도 쉬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김재규를 치켜세우자 형사과장이 듣다 듣다 도저히 못 참고 퉁을 주기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배신자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러자 김석규는 시큰둥한 표정의 형사과장을 흘낏 쳐다보고 말하기를, 상관인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것에 대해 맞니 어쩌니 가타부타하기 전에 먼저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사흘에 한 번씩, 한 달이면 열흘이나 연예인 여대생 같은 젊은 여성들을 데려와서는 안가에서 주지육림에 푹 빠져있으니 차지철 같은 게 국정을 농단하지 않았나?


그리고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00만, 200만 못 죽이겠는가.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는 차지철의 말에 흡족해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지 않으면 4.19보다 더 크고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판단에 김재규 장군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고뇌에 찬 결정을 내린 거라고 했다.


또한 김석규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건 신군부가 비리와 부정 축재로 엮어보려고 김재규는 물론 그의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너무나 청렴하고 청빈해서 오히려 조사관들이 깜짝 놀랐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냐고 말했다. 김석규는 거기에 더해 김재규 장군의 살아온 길을 살펴보자며, 딴전을 피우는 형사과장의 무료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설을 늘어놓듯 읊었다.


중앙정보부장 취임 이후 남산 고문실을 폐지하고 재임 중 간첩조작사건을 단 한 건도 만들지 않았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긴급조치 9호 해제를 건의하는 등 시대를 앞선 인권주의자에 다름 아니었고, 중정에 의한 선거개입을 차단하고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가톨릭 사제들을 방면했으며, 김영삼 김대중 등 야권인사를 지원하는 민주주의자인데다 무남독녀 외동딸의 결혼식에 친지들 외엔 누구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던 눈처럼 희고 물처럼 맑은 청백리라 아니할 수 없다고 김석규는 탄복했다.


게다가 김재규 장군이 박정희 전두환처럼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게 박정희 저격 당일에야 부하들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고, 거사 이후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냐며 김석규는 목에 핏대를 올렸다.


잠시 침묵하던 김석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형사과장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유신독재를 끝낸 사람이 누굽니까?” 묻고는 형사과장이 대답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자, “민주투사라는 사람들 누구 하나 유신독재를 끝장내기는커녕 박정희의 털끝 하나 건드려보기나 했습니까?” 재차 묻고는 역시 형사과장이 딴전을 피우자,


“함석헌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민주투사 십만, 백만도 못 한 일을 김재규 장군은 혼자서 해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회복시켜 주고 본인은 신군부에 의해 고초를 겪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김석규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형사과장은 김석규의 기나긴 사설에 뭐라 한마디 대꾸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김재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듯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역적 내지 배신자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 이상 아는 바가 없어 반박할 말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기죽지 않으려고 한마디 걸쳤다가는 김석규에게 열 마디 스무 마디 덮어써서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해 보여 더러워도 참고 입을 꾹 다물었다.


김석규가 처음부터 김재규에게 추앙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김석규 역시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김재규에게 덧씌워진 배신자 혹은 역적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경찰공무원에 응시하여 최종 면접에서 어느 눈 밝은 면접위원이 여담 삼아, “본관이 김녕이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김재규와 일족이군요. 김재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김석규는 김재규가 김녕 김씨인 줄 그때 처음 알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다는 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믿어주고 중용해준 은인에게 할 수 없는 배은망덕한 짓을 했으니 김재규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다 우연히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를 접하게 된 후 김석규는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책했다. 김재규라는 한 인간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거나 심지어 신군부의 각색대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김석규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김석규는 거사를 앞둔 한 사내의 고뇌, 거사를 단행한 후 신군부에 의해 유린 되고 해체된 한 사내의 고통, 사후에도 버려진 한 사내의 외로운 영혼을 마주하는 것 같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너무너무 미안했다. 미안해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잔 더 하러 가자. 여러분들이 이 못난 팀장 승진시켜 준다는데 내가 가만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김석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여전히 삼겹살집엔 지친 하루를 위로받으려는 술꾼들로 왁자지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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