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의 영명은 Heavenly bamboo로 대나무와 흡사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매자나무과의 상록활엽관목이다. 재배식물인 남천은 예전에는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기후 탓인지 중부지방에서도 식물이 잘 조성된 공원이나 관광지, 절 등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다.
남천은 붉은 열매와 붉게 물드는 잎이 관상용으로 보기 좋기도 하지만, 귀신과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온다는 긍정적인 믿음이 재배 확산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좋은 의미와 긍정적인 기운은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햇볕이 잘 드는 친정 담벼락에도 20년 이상 되어 키가 3m 가까운 남천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다.
야트막한 길가 화단이라 물도 영양도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닌데도, 매년 탐스런 열매를 보여주어 기특하기도 하고, 언젠가 한번 그려보고 싶다 생각만 했다.
겨울이 올 때마다 그려볼 기회만 노리던 중, 2018년 처음 시도했던 스케치는 계획한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식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엔 부족하다는 깨달음과 함께 중도 포기하고,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드디어 2022년 겨울 빨갛게 익은 남천 열매를 보며 때는 이때구나 결심했다.
풍성하게 달린 빨간 열매가 보아달라 손짓하는 듯했다.
잎은 한 가지만 배경에 넣고 중앙에 열매를 그려 넣어 동글동글 귀여운 열매들이 모든 관심을 받게 해 주겠다 마음먹었다.
열매는 잘라 와서 천천히 스케치하면 되지만, 잎과 가지의 연결구조나 색 변화 등 전체적인 부분은 자세히 관찰하고 사진 자료로 확보해 두고 참조하여야 한다.
하부의 목질화된 줄기의 구조와 색도 유의하여 관찰해 두었다.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이었던 걸까? 봄이 코앞에 다가온 2월 말인데도 이파리 색이 아직 푸르다.
다만 조금 말랐나 싶게 끝부터 적갈색으로 변해 가고, 두꺼운 잎이 뻣뻣하게 물기가 없다.
열매가 달리는 구조와 색도 기억하기 쉽게 채색해 가며 기록해 두었다.
밑그림을 화지에 옮기고 가장 중요한 열매부터 채색하려다 보니, 배경이 되는 잎과 얽혀 구분이 쉽지 않았다.
열매와 겹쳐지는 배경의 잎을 먼저 채색하고 나니 알알이 달린 열매의 형태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말끔히 드러난 열매의 구조를 밑그림대로 하나씩 그려 나간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주인공을 무대에 세우는 심정으로 열매를 한 알씩 채색하였다. 전등 아래 말라 가는 남천 열매 가지의 구조를 밑그림과 비교해 가며 진행하다 보니, 떨어진 열매가 하나둘씩 책상 위에 모였다. 물통에 담긴 물도 붓을 닦는 키친타월도 모두 빨갛게 변해 간다.
앞뒤 관계를 살펴 하이라이트와 음영, 앞과 뒤의 색을 구분해 가며 열매를 채색해 나간다.
열매 알갱이가 달리는 방향에 따라 꼭지가 보이는 각도와 하이라이트의 위치에 유의하여 밝은 색으로 채색을 시작한다.
열매가 가지에서 분리되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하나 줄기와의 연결을 고려해 가며 채색하였다.
1cm도 안 되는 작은 알갱이지만 색을 조금씩 올려가며 밀도 있고 단단한 색으로 만들어 준다.
재미있구나. 빨간 열매를 이렇게나 많이 그려 보다니 처음이다.
신나서 하나씩 그리다 보니 어느새 열매 부분 채색이 끝났다.
보타니컬아트는 스케치와 구도가 절반 이상이고, 나머지는 채색 과정의 끈기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스케치가 부족하고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작업에 확신을 가지기 힘들어지고, 채색 과정에서 확신과 끈기가 부족하면 하염없이 고민만 하다가 늘어져 중도 포기하기가 쉽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기초와 계획이 절반 이상이고 나머지는 계획대로 완수해 내는 실행력이 중요해진다.
나의 남천 열매는 조금 느슨하지만 만족스러운 스케치로 시작하였기에 큰 고민 없이 채색이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체를 완성하고 나서 세부적인 마무리를 할 요량으로, 잎 채색으로 넘어가기로 하였다.
남천의 잎은 깃모양겹잎으로 전체 길이가 30~50cm로 길고 대나무처럼 단단하며, 갈라지는 마디와 소엽의 연결 부위가 붉게 돌출되어 독특하다.
겨울이 되면 줄기부터 연결된 잎까지 모두 빨갛게 변하는데, 우리 마당의 남천은 2월인데도 아직 줄기조차 녹색을 띠고 있다.
내가 그리고자 한 것은 단 한 줄기인데...... 딸린 소엽이 참으로 많구나......
열매를 채색할 때의 열정이 한풀 꺾이고, 잎이 너무 많다며 작업이 점점 힘겨워지는 시점이다.
고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힘내서 끝까지 집중해 보자.
남천의 줄기와 잎자루는 독특한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잎자루가 줄기를 감싸며 나서 세 갈래로 갈라지고, 중심의 줄기가 자라며 다시 어긋나는 방향의 잎자루가 된다.
짙어지는 적자색의 색 변화와 골을 지어 뽀얀 표면 질감이 더할 수 없이 매력 있다.
줄기의 하부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도 하고, 단단하고 거칠게 목질화되어 있다.
열매에 시선이 집중되기를 바라며 줄기가 너무 어두워지지 않도록 질감 표현에 초점을 두어 채색하였다.
드디어 모든 부분의 채색을 마치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보아가며 색의 밀도를 높이거나 앞뒤 관계의 음영을 추가하여 작품을 마무리하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좋은 말에는 한없이 귀가 팔랑거리고 모두 잘될 것만 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희망의 좋은 점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남천이 액을 멀리하고 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꾸준히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부지런히 가꾸는 행동이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고, 결국 그 사람을 행복하고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새로이 시작된 2024년도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겨 시도하고 가꾸고, 작은 결과에도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보자 다짐한다.
최지연 作
남천 Heavenly bamboo
Nandina domestica Thunb.
수채화 Watercolor on paper
490×490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