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라는 귀여운 상수
나는 MBTI의 마지막이 J이다. 100%는 아니지만 70% 이상은 계획형이라고 확신한다. 빈도가 들쭉날쭉했지만 20대 초반부터 다이어리를 썼고, 주말의 끝에 지난주를 돌아보고 다음 주의 목표를 세우는 것을 즐겨했다. 현재도 비슷한데 계획의 텀이 길어졌다. 예전에는 일주일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면, 요즈음은 한 달이나 분기별로 계획을 세운다. 그래도 텀이 끝난 후 회고는 여전하다.
텀이 길어진 요인 중 하나는 줄어든 삶의 불안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혼란스러운 세상에 불안정성은 사라질 수 없지만, 20대 초반에 비해 불안정성은 줄어들었다. 그때는 학기마다 수업도 선택해야 하고, 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도 생각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어야 하고 취향을 탐색하느라 매주 바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에 비하면 20대 후반은 (다행히 감사하게도) 심심할 만큼 안정적이다.
반대로 새로운 경험을 하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평일에 진행한다면 휴가를 낼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스케줄도 확인해야 한다. 또 체력적으로 금전적으로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예전에는 돈만 마련할 수 있다면, 마음이나 동행자나 시간은 문제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제 여행은 휴가이자 휴식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작은 계획이 되어버렸다.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야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누구와 어디서 보낼지도 단단히 계획을 세워야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이 된다. 그런데 집사는 여행이라는 작은 계획에 더해, 여행 중 반려 고양이의 케어도 준비해야 한다.
상주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집사가 장기로 집을 비우는 건 좋지 않다. 고양이는 독립적이지만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모카처럼 외동묘이고 함께 사는 사람이 한명일 경우, 빈자리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장기로 비우는 일은 엄두도 내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루에서 3일 정도 외박으로 비울 때는 있었다. 24시간-36시간 내 돌아올 수 있다면 따로 탁묘를 구하진 않지만, 그 이상이라면 지인이나 캣시터를 알아본다. 나는 언제나 방문 탁묘를 부탁하는데, 주위에 흔쾌히 받아주는 지인들이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 없이 우리 집에 놀러만 온 지인도 있고, 임보를 해본 지인도 있고, 집사인 지인도 있다. 숙련도는 다르지만 모카를 좋아해 주고 잘 케어해주고 싶은 마음은 모두 충분하다.
어떤 이유로 집을 비우게 되든 방문 탁묘를 해준 지인에게 꼭 답례를 한다. 여행지의 먹거리 기념품을 선물하거나 다음에 밥을 사거나, 캣시터인 경우 비용을 지불한다. 비용을 지불하지만, 주위에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나 플랫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그리고 반려동물은 예외적인 날들이지만, 어린아이들이라면 매일 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저출생 이슈가 떠오르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나와 모카의 안심을 위해, 탁묘 방문자를 위한 가이드를 만들고 육성(?)하려고 노력한다. 가이드에는 모카의 특성과 방문 탁묘 시 해야 할 일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지인들과 고양이 이야기를 하게 되거나 집에 방문하면 은근슬쩍 집사의 일을 가르쳐 주며 방문 탁묘의 가상 초대권을 나눠준다.
여행뿐만이 아니다. 반려묘와 가족이 되면, 인생 계획에 고양이가 새로운 상수로 등장한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생겨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 새로운 고려 조건이 자리 잡는 것처럼 반려묘도 인생 계획의 상수가 된다. 조건의 강도나 타협 불가능성이 사람에 비해 세진 않지만, 고양이의 솜방망이처럼 강력할 때도 있다.
공간에 조건이 추가된다. 고양이를 입양하려면 깨끗하고 안전한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한데, 함께 살다 보니 추가로 바라는 게 생긴다. 햇볕이 자주 드는 곳이면 좋겠고, 캣휠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층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는데, 나무나 새처럼 고양이가 좋아하는 풍경이 있다면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여가시간에 하는 일에 고양이와 관련된 카테고리가 생겼다. 집사가 아니었다면 굳이 지속적으로 시간과 관심을 주지 않았을 일들이다. 정기적으로 길고양이 TNR 봉사를 하고, 동물영화제에 참여해보기도 하고, 동물학대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탄원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데도 새로운 호감 요인이 생긴다. 이성이든 친구든, 고양이를 키우거나 좋아하면 같은 조건의 사람이라도 더 관심이 가고 한마디라도 더 하게 되는 것 같다. 반대로 동물에 대해 비우호적이라면 호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여가시간을 보내고, 이사를 가는 등 인생의 크고 작은 계획에 고양이 모카는 귀여운 상수가 되었다.